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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넷뉴스

게시일
2013.06.04

케이팝의 전설 조용필

최근 미국 음악전문지 ‘빌보드(Billboard magazine)’가 한국의 ‘가왕(Korean king of pop)’ 조용필에 대해 “한국의 마이클 잭슨”이라 호평하며 주목했다.

지난 4월 28일자 ‘빌보드’는 「조용필이 싸이를 빌보드 케이팝 핫100차트 1위에서 끌어 내렸다(Cho Yong Pil Knocks PSY From No. 1 on K-Pop Hot 100)」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왕이 돌아왔다’(The king is back)로 시작되는 해당 기사에서 빌보드는 조용필을 ‘한국의 마이클 잭슨(as the Michael Jackson of Korea)’이라고 불렀다.

가수 조용필에게는 언제서부터 ‘국민가수’를 넘어 ‘가왕(歌王, king of pop)’이란 별칭이 붙었다. 엘비스 프레슬리(Elvis Aaron Presley)에게 ‘로큰롤의 제왕(King of Rock and Roll)’이란 별칭이 따르는 것처럼. 그가 10년만에 19집 앨범 ‘Hello'를 발표한 이래 국내외에서 폭발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최신 앨범(19집) ‘헬로’는 한국 음악가들이 작곡하던 기존 방식과 달리 미국 스웨덴 태국 영국 일본 등 23명의 외국 음악가들이 대거 참여해 제작했다. ‘바운스(Bounce)를 비롯, ’Hello'에 실린 10곡 중 6곡이 외국작곡가의 작품이다.

‘헬로’는 1년 6개월간의 제작기간, 총 5개국을 돌며 두 차례의 믹싱과 세 차례의 마스터링을 거친 끝에 탄생했다.

이 가운데 가장 주목을 받는 곡이 ‘Bounce'. 상큼발랄한 사운드가 귀를 간지럽힌다. 갓 데뷔한 풋풋한 신인의 음악 같다. 데뷔 45주년을 맞은 ‘가왕’은 변화를 주저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자신이 직접 작곡·작사하거나 한국인이 작곡· 작사했던 노래를 불렀왔던 그로선 획기적인 변신이다. 새로운 변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980년대에는 그때의 정서가 있었어요. 그땐 한(恨), 정(情)이란 게 분명히 존재했지만 지금은 사라졌죠. 단어가 바뀌듯 문화도 바뀝니다. 미국의 스탠더드 뮤직이 1950~60년대와 1990년대, 지금 다른 것과 같은 맥락이죠. 따라서 창법도 변해야 했고 가사에 싣는 감정도 절제했어요. 단, '걷고 싶다'와 '어느 날 귀로에서'는 제가 감정을 낼 수 있는 곡이어서 계산하고 억제하며 불렀죠.” (한국언론들과의 인터뷰, 2013. 5.21)

45년 간 조용필이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한 원동력은 끊임없는 연습과 자기혁신이었다. (사진제공: 와이피씨 프로덕션)

▲45년 간 조용필이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한 원동력은 끊임없는 연습과 자기혁신이었다. (사진제공: 와이피씨 프로덕션)

무명가수에서 케이팝의 원조로

조용필은 1950년 경기도(Gyeonggi-do) 화성시(Hwaseong-si) 송산면(Songsan-myeon) 쌍정리(Ssangjeong-ri)에서 교육자 집안의 4남3녀 가운데 여섯번째로 태어났다. 명문 공립(public school) 경동(Kyungdong, 京東) 중고등학교를 나왔다.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 안성기(Ahn Sung-ki, 安聖基)가 경동중학교 동창이다. 중학시절 안성기의 영향으로 기타와 인연을 갖게 됐다고 한다. 고교시절 명문대에 진학하길 바라는 부모의 바람을 뒤로 하고 음악학원에서 배운 기타에 빠져 가출을 감행한다. 그 가출이 ‘가왕’에 이르는 머나먼 여정의 시작이었다. 무명가수시절 초기 경기도의 미8군 부대 주변 음악클럽에서 활동하다 한국 제2의 도시 부산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부산은 그에게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1975년까지만해도 그는 부산을 무대로 활동하던 무명가수였다. 지상파 방송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 더더군다나 TV의 브라운관에선 볼 수 없었다.

1976년 겨울, 한 노래가 세상을 놀라게 했다. 한 해 전 발표된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세인의 심금을 움직인 것이다. 이 노래는 이미 1973년 불려졌으나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다가 2년 후 제작됐다. 때마침 재일동포 고향방문단이 부산항에 속속 들어 오는 것을 감안해 구색맞추기로 넣자고 제안했던 것. 당시 음반제작사에선 ‘그리운 님’이란 단어 대신 ‘그리운 내 형제’로 바꿔 녹음했다. 부산의 다방가, 유흥가에서 난리가 났다. 재일동포들은 눈물을 적셨고 방송사마다 조용필을 찾았다. 다시 취입한 노래가 한국인이 사랑하는 국민가요가 된 것이다.‘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부산에서 몇 달도 안돼 서울에서도 다방가를 석권했다. 소리 소문도 없이 레코드 판매고가 10만 장을 훌쩍 넘어섰다. 가요계의 대지진을 예고하는 하늘도 놀라고 땅도 뒤집어지는 사건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등장은 서울을 중심으로 문화가 발신되는 한국사회의 통념을 뒤엎고 지방에서 서울에 영향을 미치는 역설적인 ‘문화 혁명’이기도 했다.

그의 행보(move)에는 거침이 없었다. 1978년말 ‘프렌치 팝의 전설’ 폴 모리아(Paul Mauriat) 는 ‘돌아와요 부산항에(Please Return To Pusan Port)’를 경음악으로 편곡하여 발표하기도 했다. 1980년 그의 1집 앨범 ‘창밖의 여자’가 한국음반 사상 처음으로 1백만 장의 판매량을 올렸다. 동아방송(DBS)의 라디오 연속극 ‘창밖의 여자’의 주제곡이 가요계를 흔들어 놓은 것이다. 한국 가요계의 한 획을 긋는( has set a new milestone) 대사건이었다.

“미국 암펙스가 ‘골든 릴’을 주었어요. 세계 각국에서 인구 대비 최다 판매 음반에 주는 상이었죠. 제가 스케줄 때문에 미국에 가지 못해 미국대사관에 가서 받았죠.”

그의 인기는 바다 건너 일본으로 이어졌다.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게 인연이 됐다. 일본인들은 술자리, 파티에서 웬만하면 한국 가사로 그대로 불렀다. 1982년 4월 3일 도쿄 시부야 공회당(Shibuya Cityhall) 에서 열린 아시아 5개국 뮤직포럼에 출연한 게 일본 진출의 신호탄이 됐다. 1983년 5월 K콘서트홀에서 최초의 일본 공연이 이뤄졌다. 조용필이 국제 가수로 데뷔하게 된 것이다. 일본 언론들은 NHK콘서트홀 개관 이래 솔로가수로는 최대의 관객(7천5백 명)을 모았다고 주목했다.

1988년 한국과 중국사이에 국교관계가 수립되기도 전에 ‘죽의 장막(the Bamboo Curtain)’으로 불리던 중국의 베이징에서 한국 가수로는 최초의 공연을 가졌다. 냉전의 벽도 훌쩍 넘어버린 것이다. 한중수교보다 4년 앞선 1988년 8월 그는 중국 베이징 장성(長城)호텔(Hotel The Greatwall, 长城酒店)에서 단독콘서트를 가졌다. 한국 가수로는 최초로 사회주의국가 중국에서 첫 공연이 이뤄진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그가 부른 ‘친구여’가 ‘만추(晩秋)’라는 타이틀의 중국 노래로 둔갑하여 이미 불려지고 있었던 것. 1996년 ‘친구여’가 한국 대중가요로는 최초로 교과서(두산교과서 고1 음악)에 올랐다. 2002년엔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고교 음악교과서(교학사)에 수록됐다.

지난 31일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린 'Hello' 콘서트에서 열창하고 있는 조용필 (사진제공: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지난 31일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린 'Hello' 콘서트에서 열창하고 있는 조용필 (사진제공: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그의 노래엔 삶의 현실이 담겨있다

그는 지난 45년간 철저히 대중과 소통하며 가수의 길을 걸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삶의 현실을 외면했던 것은 아니다. 1980년대 중반 불렀던 ‘허공’은 허망하게 끝나버린 5.18민주화운동(The May 18 Democratic Uprising)의 좌절을 담았다. 또한 1990대 후반에 나왔던 ‘친구의 아침’은 IMF외환위기로 비롯된 대량해고, 구조조정속에 ‘친구의 안부마저 묻기도 힘겨웠던’세태를 전달하고 있다.

이번에 발표된 앨범 ‘Hello'에서도 ’저성장 격차사회(the low growth & gap society)'로 상징되는 오늘날을 배경으로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송호근과 노래를 만들었다. 19집에 수록된 '어느 날 귀로에서’가 바로 그 곡이다. ‘어느 날 귀로에서'는 송 교수가 택시로 귀가하던 중 동년배 운전기사와 나눈 얘기가 계기가 됐다. 송 교수가 노랫말을 짓고, 조용필이 작곡한 이 곡은 50대 ‘베이비붐세대(Baby Boom Generation)’의 삶을 돌아보는 노래다. ‘베이비붐 세대’란 한국전쟁이 끝난후 1955년에서 1963년에 이르기까지 높은 출산율속에서 태어나 치열한 경쟁을 겪었고 경제난, 사회적 급변으로 인해 조기은퇴를 하고 있는 50대를 가리킨다.

돌아오는 길목에 외롭게 핀 하얀 꽃들
어두워진 그 길에 외롭게 선 가로등이

빛나는 기억들 울렁이던 젊음 그곳에 두고 떠나야 하네
이별에 익숙한 작은 내 가슴 속에 쌓이는 두려움 오오오오

내 푸른 청춘에 골짜기에는 아직 꿈이 가득해 아쉬운데
귀로를 맴도는 못 다한 사랑 만날 수는 없지만
이제는 알 것 같은데

돌아오는 길목에 기다리던 그대 모습
어두워진 그 길에 나를 맞는 그대 미소

화려했던 시간들 울고 웃던 친구들 그곳에 두고 떠나야 하네
앞만 보고 달려온 지난날의 추억을 아파하지 마라 오오오오

나는 왜 귀로를 맴돌고 있나 아직 꿈이 가득해 그 자리에
나는 왜 귀로를 서성거리나 돌이킬 수 없지만
이제는 알 것 같은데

나는 왜 귀로를 맴돌고 있나 서성거리나
내 푸른 청춘에 골짜기에는 아직 꿈이 가득해 아쉬운데
나는 왜 귀로를 맴돌고 있나 아직 꿈이 가득해 그 자리에
나는 왜 귀로를 서성거리나 돌이킬 수 없지만
이제는 알 것 같은데

이 노래에는 한창 일할 나이인데 낮은 저성장, 구조조정 등 외부조건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물러나야 하는 50대들의 애환이 담겨있다. 이 노래는 앨범의 믹싱을 맡은 엔지니어 ‘토니 마셰라티(Tony Maserati)’로부터 “조용필이 작곡한 이 곡은 앨범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곡이며 가장 뛰어난 곡”이라는 라는 찬사를 받았다.

여전히 그는 폭발적인 찬사속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것은 우연이나 행운은 아닌 것같다. 최근 국내언론들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열심히 부딪혀야 한다. 내 머리가 깨지든 바위가 깨지든 벽이 깨지든. 지금 이 시대에 음악적으로 얼마나 똑똑한 사람, 잘 만드는 사람이 많나. 그걸 이기려면 폭탄 들고 뛰어내려야 한다”는 말로 음악에 대한 열정을 밝혔다.

위택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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