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참전용사가 들려주는 1953년 한국에서의 마지막 밤
진 피에르 반 에크 씨가 한국 땅을 처음 밟았을 때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어떠한 상황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겪었던 모든 경험들은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분명하다. 현재 캐나다 한국전 참전용사 협회의 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한국전쟁 정전 후 지금까지 한국을 두 번 방문했다.벤 에크 씨가 한국 땅을 처음 밟은 것은 18세였던 1952년. 그때는 한국전쟁이 한창 절정인 시기였다. 그는 ;그때 한국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전혀 몰랐다;며 ;한국이 중국 옆에 있는 나라인지 조차 몰랐다.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고,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어떤 이유로 전쟁이 발발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세계2차 대전 직후 젊은 밴 에크 씨는 입대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그 당시 젊은이들은 의무적으로 입대해야 했는데 나는 그곳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군인이 되든 뭐가 되든 여기에서 벗어나 다른 나라에 가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와중에 한국전쟁 지원병을 모집하는 걸 알게 됐다. 그렇게 해서 한국에 오게 됐다.;▲현재 진 피에르 반 에크 씨의 모습 (왼쪽)과 1953년 당시의 모습 (오른쪽). (사진제공: 진 피에르 반 에크)그는 속칭 인디언헤드(Indianhead)라고 불리는 미(美) 제2보병사단(the 2nd Infantry Division)에 배치됐다. 1950년부터 54년까지 벤 에크 씨와 같이 제2보병사단에 배속된 네덜란드 병사들은 3천여 명에 이르렀다.밴 에크씨는 오른쪽 관자놀이를 가리키며 ;배치됐던 첫 날, 내 동료병사 한 명이 철인지 수류탄 파편인지 머리로 날아들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며 ;한국에서의 첫 날은 떠올리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또 최근 에드먼턴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전쟁 참전 당시 매일 산을 올라야 했기 때문에 이제는 로키산맥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고 전했다.그는 전쟁 당시 그가 겪었던 경험들을 생생히 들려줬다. 이제는 희미해진 상처를 보여주며 ;한 번은 팔에 총을 맞은 적이 있는데 완전히 관통했기 때문에 아무 느낌이 없었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또 그는 지뢰가 터져 부상을 입은 미군 세 명을 구하기 위해 지뢰밭에 뛰어들었던 경험도 들려줬다. ;그 친구들을 구하려면 지뢰밭인지 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들을 구하려고 그냥 뛰어든 것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당시를 회상했다.▲한국전쟁 당시 무전기로 연락을 취하고 있는 진 피에르 반 에크 씨의 모습 (사진제공: 진 피에르 반 에크)하지만 그에겐 어두운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 있으면서 알게 된 많은 전우들에 대해 그는 ;나도 그들을 보호해주고 그들도 나를 보호해주는 상생관계였다. 어떤 나라에서 왔던, 어떤 인종이건, 모두가 똑같이 피를 흘리는 똑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기관총 사수였던 밴 에크씨는 항상 옆에 카투사(KATUSA) 대원이 함께 따라다녔다. 그는 ;그 친구가 가끔씩 한국음식을 만들어줬고 그때 처음 아주 매운 김치를 먹어봤다;고 회상했다.그는 당시 군대에서 만난 한국인 군인들 말고는 일반 한국인들과 접촉할 기회가 없었다.그가 한국에 온지 일년이 지난 후 휴전협정이 맺어졌고 그 뒤 반년간 한국에 계속 머물렀다. 고국으로 돌아갈 날이 다가오자 지난 일년간 목숨 바쳐 싸워왔던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제 36대 리처드 닉슨 전 미국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던 당시 진 피에르 반 에크 씨는 군대 열병식에 참여했다. (사진제공: 진 피에르 반 에크);마지막 날이었다. ;오늘이 한국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인데 아직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어떻게든 그곳에서 벗어나 ;리얼 한국;을 확인해보고 싶었다.;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미국 영화 ;M*A*S*H;의 한 장면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당시 그는 두 명의 전우들과 함께 무조건 이 캠프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우연히 주방에 들어갔는데 모든 음식쓰레기들을 트럭으로 옮기는 작업이 이뤄지고 있었다. 작업을 하고 있던 그 한국인에게 다가가 ;차 안에 우리를 숨겨서 이곳을 빠져나가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때는 나중에 어떻게 복귀할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그저 빠져나가기만을 바랬다,;며 그 날의 일을 생생히 전했다. 그와 동료병사들은 그 한국인의 도움으로 부대를 몰래 빠져나갈 수 있었다.밖에서의 하룻밤이 지나고 날이 밝아오자 그는 들키지 않고 다시 부대로 복귀해야 한다는 현실에 직면했다. 하지만 입구에는 네덜란드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몰래 다시 들어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그 주변을 서성이며 어떻게 하면 몰래 들어갈지 궁리하다가 우연히 한국인이 운영하는 가게를 발견했다. 그 가게는 신발, 군복, 군 장비 등 화기류를 제외하고 다양한 종류의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그들은 그곳에서 미군 모자와 군복을 사서 입고 군용차량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미군인척 가장한 그들은 담배를 미끼로 지나가는 한국인 병사에게 ;입구에 다다르면 우리가 경례를 할 것이고 그럼 최대한 빨리 운전해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고 부탁했다.그는 ;입구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네덜란드 병사들은 미군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는 우리를 보고 미군 병사인 줄 알고 우리에게 경례를 했다. 운 좋게 아무 문제 없이 들어갈 수 있었고 막사 안으로 들어가니 동료병사들이 모두 깜짝 놀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우리에게 경례를 하더라. 우리가 모자를 벗고 나서야 누구인지 알아보더라;며 웃음을 지었다.고국으로 돌아간 후 벤 에크 씨는 대학에 입학해 엔지니어 학위를 취득했다.1958년 그는 캐나다로 이민을 갔고 캐나다 서남부에 위치한 에드먼턴에 정착했다. 그리스 여자와 결혼해 현재 슬하에 두 딸을 두고 있다.▲고국으로 돌아간 후 진 피에르 반 에크 씨의 모습 (사진제공: 진 피에르 반 에크)캐나다 한국전 참전용사 협회 회장을 6년간 맡아온 그는 지난 8일 조희용 주 캐나다 한국대사로부터 기념패를 받기도 했다.그는 ;그 협회에서 내가 가장 어려서 지금까지 회장 자리를 맡은 것;이라며 ;다른 회원들은 모두 80세가 훌쩍 넘어서 그 중에서 78세인 내가 가장 젊은 사람이다;며 웃으며 말했다.▲2010년 비무장지대 (DMZ)에 방문한 진 피에르 반 에크 씨 (사진제공: 진 피에르 반 에크)캐나다 인이 아닌 사람으로서 캐나다 한전 참전용사 협회 회장을 맡은 것은 그가 처음이다.그는 ;우리 협회는 미국, 필리핀 등 어느 나라건 한국전에 참전한 용사들은 누구나 환영한다. 어떤 나라의 국적을 가지고 있건 우리 참전 용사들은 한국에서 같은 전쟁에서 목숨 바쳐 싸운 용사들이다;라고 강조했다.협회의 회원수가 매년 줄고 있고 현재는 75명의 회원만이 남아있다. 이들은 매년 크리스마스 파티뿐 만 아니라 매월 정기모임을 가지며 각종 기념식 등 다양한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또한 다양한 봉사활동에 참여해 모은 기금으로 사관생도, 학교, 그리고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벤 에크 씨는 지난 2000년 한국전쟁 발발 50주년 기념으로 초대받아 두 번째로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에서 머무는 동안 그는 전쟁 중 목숨을 잃은 캐나다와 네덜란드 참전용사들을 기념하는 참전 전적비를 방문해 추모했다.▲2000년 당시 부산시장의 초청으로 한국을 다시 찾은 진 피에르 반 에크 씨 (사진제공: 진 피에르 반 에크)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이한 2010년에도 한국을 다시 방문해 1951년 가평전투가 일어났던 가평일대를 방문했다.▲2010년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만난 스티븐 하터 전 캐나다 총리와 사진을 찍고 있는 진 피에르 반 에크 씨와 그의 부인 메이 반 에크 씨. (사진제공: 진 피에르 반 에크)그는 ;한국사람들은 매우 정이 많은 것 같다;며 ;공항에 도착한 순간부터 악수를 청하고 심지어 어린 아이들도 다가와 악수를 하더라. 한국인들은 어른들을 매우 공경하는 예의 바른 사람들인 것 같다;고 말한다.또한 그는 ;경제적으로 기술적으로 엄청난 발전을 이룬 한국이 자랑스럽다;며 ;전쟁의 아픔에서 벗어나 세계 강대국이 된 한국인들의 긍지가 놀랍다;고 덧붙였다.한국전쟁 당시 겪었던 모든 경험들과 그곳에서 만난 전우들의 이름들이 이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벤 에크 씨는 여전히 한국이란 나라에 대해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그는 ;더 나이 들어 다 잊어버리기 전에 책을 써내야겠다;며 미소를 지었다.존 던바코리아넷 기자 2013.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