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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방가구의 명가 한샘

    주방가구의 명가 한샘

    ▲ 한국의 앉는 문화의 산물인 대청마루와 서구식 입식 주방을 접목시킨 한샘의 주방가구 모델.한국의 전통가옥 구조에서 부엌은 거실과 침실에서 분리된 별도의 공간이었다. 한 세대 전만해도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재래식 부엌에서 생활을 했다. 불을 때는 아궁이는 워낙 낮게 만들어 주부들은 허리를 굽혀 일해야 하는 불편을 겪었다. 음식물 폐기물 또한 부엌에서 처리할 수 없어 별도로 정리하여 외부에 버리는 번거로움을 겪어야 했다.1970년 부엌가구 전문기업으로 출발한 한샘은 한국에 ;입식 주방;이라는 새로운 주방문화의 개념을 도입했다. 입식주방은 동선이 길고 일이 번거로웠던 과거 주방일의 불편함을 해결했다. 잘 정비된 개수대, 수납이 잘 되는 선반과 찬장, 조리대부터 가스레인지, 식탁까지 빈틈없는 구성으로 구성된 부엌가구 덕분이다. 소비자들은 재료 손질부터 요리, 식사와 마무리까지 모두 한 곳에서 마무리할 수 있는 입식 주방의 편리함에 크게 호응했다.한샘은 ;싱크대;로 통칭되던 부엌가구 시장의 한계를 넘기 위해 현대인의 집구조와 소비자의 취향, 생활방식과 음식문화를 끊임없이 연구하고 제품에 반영했다.▲ 바닥의 버튼을 누르면 전기 콘센트가 밑에서 솟아오르는 스마트 테이블. 주방에서 많은 일을 보는 현대인의 생활 방식을 잘 반영했다.▲ 리모컨으로 조정 가능한 선반과 주방 내 자투리 공간. 주방을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다.한샘은 탕과 국을 즐기는 한국인들의 음식문화를 고려하여 솥, 냄비 등 부피가 큰 주방용품과 각종 식재료 보관을 위해 서랍과 찬장의 수납효과를 최대화시킨 주방가구를 디자인했다. 오븐과 식기세척기를 주로 사용하는 해외 고객의 식문화도 디자인에 반영됐다.한샘이 디자인한 주방은 음식과 식사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부엌일 뿐만 아니라 컴퓨터 등 다양한 작업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물기가 닿지 않고 안전하게 콘센트를 사용할 수 있게 식탁 표면에서 올라오는 전자식 콘센트 장치를 선보였다. 공간을 최대한 살리되 주방에서 가족과 소통하며 다양한 활동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또, 간혹 방치될 수 있는 주방 한 켠 남는 공간을 리모콘으로 작동해서 가림막으로 가리거나 혹은 걷어서 상황과 용도에 맞게 사용할 수 있게 설계했다.▲ 탕과 국을 즐기는 한국인의 음식문화를 반영해서 부피가 큰 주방용품 수납을 위해 큰 서랍을 여러 개 디자인한 한샘의 키친바흐 모델. 모든 서랍은 살짝 누르면 쉽게 열리도록 설계됐다.▲ 밝고 온화한 나무색과 샹들리에 등 서구식 취향을 선호하는 고객에게 인기 높은 주방가구 모델.▲ 수납을 가장 중요시하는 소비자들의 요구를 반영한 찬장.한샘의 주방가구는 해외에서도 각광받고 있다, 한샘은 1986년 미국 법인 설립을 시작으로 중국과 일본에 해외법인을 세웠다. 미국에서는 소비자가 한샘 딜러와의 일대일 상담으로 견적부터 가상디자인 이미지 시연 등을 보며 자신이 원하는 주방을 직접 선택, 설계할 수 있다. 사실 평택을 비롯한 한국에 거주하는 미군 전용아파트에서 한샘 주방가구를 접한 주부들의 입소문에서도 한샘의 인기는 잘 드러난다. 중국에서는 현지 건설사의 아파트 시공 과정에서 한샘의 주방가구가 도입되고 있다.한샘은 오늘날 주방가구는 물론 종합 가구, 인테리어 분야에서도 업계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 해에는 업계 최초로 매출 1조원을 달성하며 주방가구 업계를 선도하고 있다.글 윤소정 코리아넷 기자사진 전한 코리아넷 기자arete@korea.kr 2014.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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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0년 전 '사직대제' 되살아나다

    230년 전 '사직대제' 되살아나다

    조선의 태조는 나라를 세우면서 왕의 공식집무공간인 경복궁의 동쪽에 종묘를, 서쪽에 사직단을 지었다. 종묘에서는 역대 임금의 신위를 모시는 제사 ;종묘제례(宗廟祭禮);를, 사직단에서는 땅과 곡식의 신을 모시는 '사직대제(社稷大祭)'를 지냈다. ;사;는 땅의 신을, ;직;은 곡식의 신을 의미한다. 예를 갖추어 지내는 제사 의식이 백성에게 편안함과 풍년을 가져다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이후, 1988년 전주이씨대동종약원(현 사직대제보존회)에 의해 복원되어 현재는 매년 9월 첫째 주 일요일에 사직단에서 거행되고 있다.▲ 국립국악원은 12일 조선 전통제사의식인 '사직대제'를 복원해 무대에 올린다.국립국악원은 정조대의 문헌인 사직서의궤(1783)를 바탕으로 음악, 악기편성, 복식, 의물 등을 체계적으로 고증해, 이를 무대에서 재현한다. 신을 맞이하는 '영신례'부터 신을 보내는 '송신례', 제사에 쓰인 축문과 폐백을 태우는 '망료'의식 등 10개의 절차가 약 90분 동안 이어진다. ▲ 매년 9월 사직단에서 펼쳐지는 조선의 사직대제 재현 공연. 땅과 곡식의 신에게 풍년을 기원했던 의식이다.특히, 국악연구실은 1928년 녹음된 축음기(SP)음반 「Victor49802」에 수록된 아악(雅樂, 궁중의식에서 연주된 전통음악)을 분석해 이를 이번 공연에 반영했다. 이전보다 훨씬 빠른 당시의 음악을 생생히 느껴볼 수 있다.의물과 복식, 제례 절차는 각 분야 전문가들의 참여로 이뤄졌다. 특히 안동대학교 이은주 교수의 도움을 받아 사직대제에 사용되는 의물 ;조촉;을 선보인다.;조촉(照燭);은 밤에 제사를 지낼 때 신호를 담당했던 큰 등롱(燈籠)을 가리킨다. 1m 가량의 큰 등에 불을 밝히고, 신호에 따라 세우고 눕혀서 음악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조촉 제작에는 여러 명장이 참여했다.이번 공연을 기획한 국립국악원 송지원 국악연구실장은 ;조선 문화의 전성기를 이끈 정조(正祖)대에 거행된 사직대제의 음악과 춤을 재현함으로써 우리 음악문화의 정제미를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공연 관람은 무료이며, 관람권은 당일 예악당 로비에서 선착순으로 배포된다. (문의 02-580-3358)이승아 코리아넷 기자사진 국립국악원slee27@korea.kr▲ 국립국악원에서 선보이는 '사직대제' 공연 포스터 2014.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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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도가 올바른 명칭”

    “독도가 올바른 명칭”

    에드 로이스(공화;캘리포니아) 미국 하원 외교위원장은 6일(현지시간) 한국 동해의 끝에 있는 섬, 독도의 표기와 관련, "올바른 명칭은 독도"(The proper name is Dokdo island.)라고 밝혔다.로이스 위원장은 이날 워싱턴DC 하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장에서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독도 문제는 역사적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밝혔다. ▲ 에드 로이스(공화;캘리포니아) 미국 하원 외교위원장은 6일(현지시간) 워싱턴DC 하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장에서 "독도 문제는 역사적 관점에서 봐야 한다"며 공식 표명했다. 사진 위는 독도의 동도. 아래는 독도의 서도.연합뉴스에 따르면 로이스 위원장은 "미국 지명위원회가 일본 측의 로비에 따라 미국 지도 상의 독도 명칭을 바꾸는 결정을 내린 사실이 2008년 드러났을 때 나는 한;일 강제병합과 독도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됐다"며 "우리는 역사를 이해해야 하고 과거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이해해야 한다"고 밝혔다.이어 그는 최근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 군대 위안부 동원에 강압성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데 대해 "위안부 동원이 강압에 의해 이뤄졌으며 위안부들이 '성노예'(sex slaves)로서의 삶을 살았다는 역사적 기록은 매우 분명하다"며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성노예로 죽어간 위안부 여성들이 많이 실존했음에도, 이를 부정하는 것은 2차 세계대전 때 홀로코스트도 유대인 학살도 없었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공포스럽다"고 지적했다.북한 인권문제에 대해서도 "올해 초 발표된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보고서가 북한인권 관련 입법활동에 많은 지렛대를 주고 있다"며 "인권을 유린한 북한 관리들을 제재대상에 포함하는 대북 금융제재 강화법안(H.R 1771)이 올해 말 하원에 이어 상원에서도 통과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로이스 위원장은 미국의 대북정책 변화 가능성에 대해 "우리는 1994년 제네바 합의 이후 20년간 노력해왔으나 결론을 찾지 못했다"며 "북한 사회에 정보를 유입시켜 북한 주민들과 당국자들의 생각을 바꾸도록 하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고 강조했다.글 사진 위택환 코리아넷 기자whan23@korea.kr 2014.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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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직도 전설은 계속되고 있다

    아직도 전설은 계속되고 있다

    1996년 독일 중부의 소도시 굼머스바흐(Gummersbach). 20대 한국청년이 나타났다. 평범한 동양인의 체형과는 달리 그는 2m3cm의 거대한 체격의 소유자였다. 큰 키에 민첩함과 파워까지 갖춘 그는 독일 핸드볼 분데스리가를 휘저었다. 전무후무한 분데스리가의 전설 윤경신의 전설은 이렇게 시작됐다.1996년 독일무대에 데뷔한 이래 굼머스바흐에서 10시즌, 함부르크에서 2시즌 등 총 12시즌을 뛰며 8차례나 득점왕에 올랐다. 2000-2001시즌에는 324점을 기록, 분데스리가 한 시즌 유일하게 300득점 이상을 달성했다. 지난 2001년에는 국제 핸드볼 연맹으로부터 올해의 핸드볼 선수(IHF Welthandballer)로 선정되었다. 그가 거둔 2,908골은 42년 역사의 분데스리가 통산 최다득점으로 아직도 깨지지 않았다. ▲ 윤경신 현 두산 남자핸드볼팀 감독이 경기도 의정부실내체육관에서 선수들의 연습을 지켜보고 이다.그의 앞을 가로막을 상대는 어디에도 없었다. 국제무대에서도 1995년과 1997년 세계선수권대회와 2004년 아테네올림픽 득점왕에 오르는 등 명실상부 최고의 핸드볼 스타로 코트를 누볐다. 핸드볼 국가대표로 250회 이상 출전하였다. 1990년 베이징부터 2010년 광저우 대회까지 아시안게임 6번, 올림픽은 1996년 애틀랜타 대회를 제외하고 1992년 바르셀로나때부터 지난 2012런던올림까지 5차례나 출전했다.2008년 그는 독일생활을 접고 귀국했다. 30대 후반임에도 그는 타고난 체력으로 2013년 6월까지 자신이 뛴 모든 대회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2013년 9월 코리아리그에서 감독으로서 첫우승을 따냈으며 팀의 5년 연속 우승을 지켜냈다. 어느새 40대 초반에 접어든 그를 만나 핸드볼 인생을 들어봤다.* 윤경신 감독과의 인터뷰▲ 윤경신 감독(왼쪽)이 자신의 핸드볼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독일생활을 성공리에 마치고 귀국했다. 그곳에서 계속 지도자 생활을 할 수 있고 다른 나라에서도 좋은 조건으로 영입하려 했을 텐데, 그걸 마다하고 귀국한 이유는?제의가 있었다. 당시 네 살 난 아들이 있었고 아내도 한국에 돌아가고 싶어 해서 여기서 계속 남느냐 한국에 들어가느냐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 결국에는 가족들 때문에,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오랜 외국생활로 힘든 점도 느꼈기 때문에 귀국하게 됐다.- 농구, 배구를 하지 않고 핸드볼을 선택한 이유는?서울 숭인초등학교 4년 시절 특별활동시간에 핸드볼을 선택하게 됐다. 공을 잡아 보니 희한했다. 농구나 축구공처럼 크지도 않고, 야구나 탁구공처럼 작지도 않은 게 참 어중간했다. 한데 그게 맘에 쏙 들었다. 그 생소하고 특이한 사이즈에 묘한 호기심이 일었고, 손으로 하는 운동이라는 점도 흥미로웠다. 숭덕 초등학교에 핸드볼팀이 창단돼 전학하게 됐다. 그 당시에도 농구, 배구는 굉장히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던 스포츠였고, 핸드볼은 좀 생소했던 종목이라 궁금했다. 핸드볼을 한다고 했을 때 처음엔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머니도 핸드볼 골키퍼 출신이었더라. 어머니는 힘든 핸드볼을 왜 하려고 하느냐며 처음엔 말리셨다.- 최고 득점왕 기록은 아직도 여전한가?2,908골 득점하며 최고 득점왕에 올랐다. 3천 골을 못 넣은 게 조금 아쉽기는 하다. 이 기록이 깨지긴 쉽진 않을 것 같다.- 우월한 신체적 조건이 궁금하다. 집안 내력인가?그렇다. 부모님 모두 키가 크다. 아버지는 181cm, 어머니는 170cm정도 된다. 누나도 175cm다. 동생(윤경민)도 지금은 부상 때문에 은퇴했지만 두산 핸드볼팀에서 활약했다. 집안 자체가 골격과 키가 크다. 선천적으로 몸이 건강하고 골격이 좋다 보니깐 외국선수들과의 몸싸움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부상도 적었고 이런 우월한 신체적 조건 덕분에 해외에서도 오래 활동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굼머스바흐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팀과 지역 주민들은 어떻게 일체감을 갖고 있나?대학교 3학년이었던 1995년 아이슬란드 세계선수권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했다. 그때 굼머스바흐 팀도 출전했고 관계자들도 있어서 나를 눈여겨 본 것이다. 그 당시에 그들에게도 동양인, 그것도 한국인을 영입하는 건 하나의 모험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당시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영입이 가능했던 것 같다. 그렇게 인연이 돼서 굼머스바흐에 들어가게 됐다. 사실 중, 고등학교 때부터 유럽, 특히 독일무대에서 뛰어보는 것이 내 꿈이었다. 막연한 꿈만 가지고 있었는데, 운 좋게도 기회가 왔다. 그때는 돈이고 조건이고 상관하지 않고 무조건 사인했다. 그냥 나는 무조건 간다;고 했다.굼머스바흐는 매우 조그만 도시다. 인구가 적어 핸드볼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핸드볼만 봐도 유럽이 핸드볼 시스템이 활성화 돼있고, 리그도 체계적으로 구성돼 있다.처음에 그곳에서 적응할 때는 많이 힘들었다. 언어소통이 가장 어려웠다. 독일팬들의 지지와 사랑은 엄청난 힘이 됐다. 한국인이라고 직접 담근 김치도 가져다 주기도 했다. 독일인들이 만든 김치가 한국 맛을 낼리 만무하지만 그들의 정성이 너무 감사했다. 독일팬들은 무뚝뚝해 보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보내는 애정은 두터워졌다. 한마디로 말해 그들은 의리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특히 중년, 노년부부들이 보내준 분에 넘친 사랑은 잊을 수 없다.시간이 지나면서 같이 뛰는 선수들과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배우려고 하면서 가까워졌다. 4년 째 되니깐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되더라. 실수를 해도 받아주고 이해해주니깐 자신감이 생기더라. 나는 참 인복이 많은 사람 같다.- 지금까지 가장 인상에 남는 순간은?2007년 함부르크에서 열린 유럽핸드볼연맹(EHF)컵에서 부동의 1위 팀을 꺾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또 굼마스바흐팀 은퇴식 때는 정말 감동적이었다. 그때 2만여 명의 홈팬들이 모였다. 정말 울컥했다. 조촐한 은퇴식을 생각했는데, 그렇게 많은 팬들이 와서 나를 응원해줄지 생각도 못했다. 지금까지 독일팬들과 SNS를 통해서 꾸준히 연락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 경기했을 때도 오신 분들도 있었고, 심지어 내 결혼식 때도 10여 명의 독일팬들이 찾아와 축하해줬다. 너무 고마운 분들이다.- 경희대 박사논문 주제가 ;리더십과 선수들의 자기관리, 팀 문화;다. 당신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리더십이란?어떤 리더십이 옳다고 정의 내리기 쉽지는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선수들과의 소통, 선수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리더십인 것 같다. 동시에 훈련을 할 때는 확실하고 카리스마 있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지도자로서 아직 부족한 점이 많지만 계속 노력하는 중이다.선수들 대부분 중,고등학교 때부터 계속 강압적이고 지도자의 눈치를 보는 운동을 해왔다. 나도 그랬다. 이제는 너무 강압적인 것이 아닌 스스로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려고 한다. 감독이 지시한 대로 그냥 따라 하는 것은 로봇에 불과하다. 지도자가 말을 꺼내기 전에 선수들끼리 서로 의논하고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것. 그런 자율적인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다.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1,2년 안에 이뤄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조금씩 노력하고 있고 그 변화가 조금씩 보이고 있다. 이것이 내가 강조하는 소통의 리더십이다.- 롤모델을 독일대표팀의 하이너 브란트 감독으로 삼았다고 들었다. 그분의 어떤 면이 본받을만한가?하이너 브란트(Heiner Brandt) 감독은 초대 굼마스바흐 감독이었다. 나를 집에도 초대하기도 했고, 당시 독일어를 못했던 나는 한독사전을 갖고 대화를 나누면서 정을 쌓았다. 자상한 아저씨 같은 스타일이었다. 체육관에서는 정말 독하고, 카리스마적인 리더였다. 푸근하지만 일을 할 때는 혹독하게 가르치는 지도자였다. 그런 모습에 나는 그분을 롤모델로 삼았다. 유럽 무대는 프로이기 때문에 어떠한 실수나 건방진 태도에 굉장히 엄격하다. 자유로우면서도 정해진 규칙을 잘 지켜야 하는 곳이 유럽 무대다. 예의를 중시하는 이곳에서 밝은 인사성과 겸손한 태도는 큰 도움이 되었다. 독일의 조직문화와 한국의 유교적인 전통과 예의가 잘 어울렸던 것 같다.▲ 핸드볼은 희로애락을 함께 한 인생의 전부라고 말하는 윤경신 감독- 당신이 생각하는 핸드볼의 매력은?스피드와 몸싸움이다. 핸드볼은 몸싸움을 허락하는 구기종목 중 하나다. 가장 격렬한 운동이 핸드볼이기 때문에, 스피드와 몸싸움 테크닉이 그 스포츠의 가장 큰 매력이다.몸싸움에서 지지 않기 위해 독일에서 10kg이상을 찌웠다. 웨이트 훈련을 통해 몸을 키웠고 몸무게를 110kg이상 불렸다. 서로 간의 기 싸움이 많은 운동이다. 그때 서로 몸을 부딪치고 기 싸움하던 선수들이 지금은 좋은 친구가 됐다. 이 운동 덕분에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요즘도 국제대회에 나가면 지도자로 활동하는 옛 동료들을 만나곤 한다. 시합이 끝난 후 그들과 맥주 한잔을 걸친다. 여러 나라에 친구들이 있다. 한국에서만 활동했다면 이런 친구들을 어떻게 만났을까.▲ 윤경신 감독(왼쪽)과 그가 이끄는 두산 남자핸드볼팀.-당신에게 핸드볼은 어떤 의미인가?핸드볼은 내 인생이다. 계속 직업으로 가지고 있고, 지금까지 살아갈 수 있게 만든 것이 핸드볼 때문이었다. 인생과 같다. 핸드볼에는 희노애락이 있다. 기쁘고 슬플 때도 있고, 이것 때문에 눈물 흘린 적도 있었다.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앞으로 더 해야 할 일들이 있다. 이 운동을 그만 둘 때까지 핸드볼을 좋은 이미지로 가지고 가고 싶다.▲ 윤경신 감독이 독일 굼마스바흐와 함부르크 팬들에게 행운을 비는 메시지.글 위택환, 손지애 코리아넷 기자사진 전한 코리아넷 기자whan23@korea.kr 2014.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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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외학자들과 한글의 흔적을 찾다

    해외학자들과 한글의 흔적을 찾다

    국외에 흩어진 한글 자료를 바탕으로 앞으로의 자료 정리 및 보존을 논의하는 국제 학술 대회가 지난 5일 국립한글박물관에서 열렸다.;국외 학자가 이야기하는 한글, 한글자료;를 주제로 한 이번 학술 대회는 국립한글박물관의 개관을 기념해 국외에 존재하는 한글 자료를 파악하고 한글 연구의 지평을 확장하기 위해 마련됐다. 학술대회에는 국립한글박물관 개관위원회 위원장인 홍윤표 교수를 비롯, 중국과 일본에서 온 학자들이 ;문자․자료로서의 한글;을 주제로 발표했다.▲ 문영호 국립한글박물관장이 5일 국립한글박물관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서 환영사를 전달하고 있다.문영호 국립한글박물관장은 환영사에서 ;한글과 한글로 구축된 우리 문화유산을 잘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이를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며 ;향후 국내외를 망라해 과거 생산된 한글 자료 가운데 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있는 자료를 발굴;조사하는 일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 국립한글박물관 개관위원회 위원장 홍윤표 교수가 '한글에 대한 연구과제'에 대해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한글에 대한 연구 과제;라는 주제로 기조연설을 한 홍 교수는 ;한글은 상당부분 연구가 되어 있다는 인식이 있으나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훈민정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한글;이란 이름은 누가 만들었나? 어떤 변화를 거쳐 한글이란 명칭이 생겼나? 등 의문이 많다;라며 ;이를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다룰 수 있는 깊은 연구가 이뤄지길; 기대했다.▲ 중국에서 온 왕단 교수가 베이징대학에 소장된 한글 문헌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이어, 첫 발제자로 나선 중국 베이징대의 왕단(王丹) 교수는 베이징대학 도서관 고적실에 소장되어 있는 총 23종 55권의 한글 문헌 현황과 가치에 대해 발표했다. 특히,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필사본,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와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 이본 등 다양한 문헌이 남아 있었다;면서 ;앞으로 조사해야 할 도서관 숫자가 많은 만큼 한;중 두 나라 정부와 연구기관의 협력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일본 도야마대의 후지모토 유키오 명예교수가 한글이 지방에 보급된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국립한글박물관)일본 도야마대의 후지모토 유키오(藤本 幸夫) 명예교수는 일본 전역에서 한국학 문헌 자료의 흔적을 찾고 이를 정리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이번 발표에서는 ;천자문;을 중심으로 조선 시대 한글의 지방 보급에 대해 소개했다.후지모토 교수는 ;한글이 1446년 공포되기 전까지는 천자문 훈음을 암송하는 정도에 머물렀으나 한글의 편리성을 인식하면서 세조(1455-1468)부터 성종(1470-1494) 경에 서울을 중심으로 한자본 천자문에 훈음을 달아 전파된 것으로 생각된다;고 밝혔다.▲ 중국 연변대 김광수 교수가 북한과 중국에서 어떻게 한글 자료를 수집, 보존해왔는지 설명하고 있다. (사진 국립한글박물관)중국 연변대의 김광수(金光洙) 교수는 북한과 중국 자료를 중심으로 한글 자료의 수집과 보존 방안에 대해 발표하며 최근 북한의 한글 자료 현황과 보존․관리 방식 등을 소개했다. 김 교수는 "한글 자원의 수집과 정리는 한 나라나 집단에 의해서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한민족의 문화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어깨에 맡겨진 공동한 과업"이라며 "한글의 수집과 정리를 위해 서로 협력하고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이승아 코리아넷 기자slee27@korea.kr 2014.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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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천년 만에 다시 부활한 폼페이

    2천년 만에 다시 부활한 폼페이

    서기 79년 8월24일 베수비우스 화산 폭발로 로마제국의 도시 폼페이는 한 순간에 잿더미가 됐고 미처 탈출하지 못한 주민들은 3.7m 높이의 화산재 아래 파묻혔다. 나폴리 근처 로마의 항구였던 폼페이는 서기 1세기 약 2만 명의 인구의 도시였다. 하지만 화산 폭발 이후 이 도시는 당대의 기록 속에만 살아 있을 뿐, 점차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1738년 우물을 파던 한 농부가 이 도시의 유적을 발견했고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면서 원형 경기장, 두 개의 극장, 상점과 주택이 늘어선 격자 배열의 거리, 프레스코화, 그리고 수많은 벽화들이 발견됐다. 무엇보다도 갑자기 생을 마감한 폼페이 시민들의 형상들도 나왔다.▲ '로마제국의 도시문화와 폼페이' 전시에서는 당시의 화려한 벽화들을 다수 볼 수 있다.2천년전에 사라졌던 폼페이가 되살아났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로마제국의 도시문화와 폼페이' 전시가 9일부터 내년 4월 5일까지 열린다. 이번 전시에서는 폼페이에서 출토된 조각품, 장신구, 벽화, 캐스트(화산재 속 빈 공간에 석고를 부어 당시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한 석고상) 등 2백98건의 다양한 유물들이 선보인다.기원전 80년에 로마제국으로 흡수된 폼페이는 도시 곳곳이 재정비되어 신전과 공공건물, 대저택이 건설됐다. 기원전 70년에 지어진 원형경기장에서는 검투사 경기가, 대극장에서는 연극 공연이 열렸다.▲ 원형경기장에서 벌어진 검투사 경기 때 쓰인 청동 투구폼페이 대저택은 입구를 지나면 집 내부가 보이도록 설계됐다. 집은 지붕이 없는 뜰과 정원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방들이 배치됐다. 각 방의 벽은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들로 장식됐다. 집 안쪽의 정원은 수도 시설과 연결된 분수, 그리고 조각품들이 설치됐다.이번 전시에는 집 내부 벽을 장식한 벽화가 대거 선보인다. 꽃과 나무, 새들이 있는 정원의 그림, 신화 속의 장면과 기둥을 묘사한 벽화에서 폼페이 시민들의 조형감각을 볼 수 있다. ▲ 폼페이의 대저택과 거리 곳곳에 세워진 조각상들폼페이 사람들은 그리스의 신뿐만 아니라, 토착신을 섬겼다. 폼페이 광장에는 주피터와 그의 아내인 주노, 미네르바, 비너스와 바커스 등 여러 신들의 신전이 도시 곳곳에 세워졌다. 집 안에도 사당을 만들어 축복을 기원하였을 정도로 종교의식이 생활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더불어 도시 곳곳에 조각상이 세워졌는데 이번 전시에서도 먹이를 사냥하는 동물들의 조각상을 볼 수 있다.▲ 폼페이에서 발굴된 어린아이 조각상▲ 술의 신인 바커스의 청동상여성들의 장신구는 종류가 매우 다양했지만 당시 남성에게는 반지만 허용됐다. 머리띠, 금으로 된 그물 장식, 다양한 모양의 머리핀이 아직 남아 있으며 목걸이, 팔찌, 반지 등도 발견됐다.당시 폼페이에서 활발한 경제활동이 이루어졌는데 도심 번화가에 즐비하게 늘어선 상점에서 판매한 빵, 와인을 담은 항아리, 저울과 추 등이 발견됐다. 폼페이 유적에서 확인된 화덕과 빵 덩어리로 보아 오늘날과 비슷한 방법으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폼페이에서 발견된 다양한 장신구들.▲ 폼페이유적에서 발굴된 뱀 모양의 팔찌.폼페이에서는 근대적인 형태의 수술 도구들이 발견돼 당시의 의료 기술이 상당히 발달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몇몇 수술 도구는 지금도 사용되고 있을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졌다.폼페이 도시 성벽 외곽에는 무덤들이 많이 확인되고 있는데, 법으로 도시 내에서는 무덤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신은 매장하거나 화장했는데, 타고 남은 재는 유골 항아리에 담겼다.▲ 폼페이에서 사용됐던 수술도구폼페이 시민들의 마지막 모습도 볼 수 있다. 쭈그린 채 손으로 입과 코를 막은 남자, 옷으로 얼굴을 감싼 채 엎드려 죽은 여인, 집안에 묶여 있다가 고통스럽게 죽어간 개의 화석은 당시 비참했던 폼페이의 최후를 말해준다.폼페이 도시 성벽 외곽에는 무덤들이 많이 확인되고 있는데, 법으로 도시 내에서는 무덤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신은 매장하거나 화장했는데, 타고 남은 재는 유골 항아리에 담겼다.▲ 화산 폭발로 희생된 동물과 사람들의 형상.▲ 폼페이 화산 폭발 당시 쭈그린 채로 손으로 입과 코를 막고 있는 숨진 남자의 모습.이번 전시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02) 2077-9000 또는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http://www.museum.go.kr)에서 얻을 수 있다.임재언 코리아넷 기자사진 전한 코리아넷 기자, 국립중앙박물관jun@korea.kr 2014.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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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국가 : 류큐왕국특별전

    독립국가 : 류큐왕국특별전

    서기 1500년 11월 17일 남쪽 먼바다의 섬나라 유구국에서 사신을 보내왔다. 사신은 아래와 같은 글을 조선 국왕에게 전했다.;유구국 중산왕(中山王) 상진(尙眞)은 삼가 조선 국왕 전하께 아룁니다. ;;매양 사신을 파견하여 험한 산을 넘고 먼 바다를 건너 가게 하려고 하였으나, 바다 길을 알지 못하여 막히고 서신 연락이 오랫 동안 끊어져 갈 수 없었습니다;..천만 바라옵건대, 현명하신 왕께서 산해(山海) 같은 아량을 베푸시어 조그만한 정성을 받아들이고, 그 책(대장존경(大藏尊經)을 우리 나라로 가지고와 백성들을 가르치고 깨우쳐 영구히 국가를 안정시키기를 바랍니다.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이 지극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유구국은 일본의 남쪽 끝 오키나와에 존재했던 류큐 왕국을 말한다. 류큐왕국의 의 역사와 문화를 서울에서 볼 수 있는 '류큐 왕국의 보물' 특별전이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이번 특별전의 주제인 류큐 왕국은 15세기에 등장한 독립왕국으로,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주변국인 조선, 중국, 일본과 교류하며 문학, 예술 등 다방면에서 독특한 문화를 꽃피웠다. 17세기 초반에 일본 사쓰마번(薩摩藩)의 침입을 받고, 이후 에도막부(江戶幕府)의 간섭을 받으며 중국과 일본 양측에 조공을 바쳤으며, 이후 1879년 일본 메이지 정부에 의해 병합되어 현재의 오키나와현으로 편입됐다.▲ 류큐 국왕의 왕관. 나하시 역사박물관 소장. 비녀가 함께 꽂혀 있어 눈길을 끈다.이번 전시는 류큐 왕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수준 높은 유물 200여 점을 선보인다. 이 가운데는 일본 국보 33점을 비롯해 중요문화재 6점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류큐 왕실의 상징인 왕관과 왕실 복식, 왕실 의례용 기물 등 류큐 왕국의 통치자 쇼(尙)씨 왕가의 유물과 왕실 칠기, 조선의 영향을 받은 도자기, 류큐 왕국의 역사를 담은 서적과 회화류, 전통 악기 등 다양한 유물이 전시된다. 오키나와현에 있는 나하시역사박물관, 오키나와현립박물관․미술관, 우라소에시미술관, 슈리성관리센터, 우라소에시교육위원회 등 5개 기관을 비롯 도쿄국립박물관, 규슈국립박물관 등 다양한 기관이 전시를 위해 협력했다.눈에 띄는 유물은 류큐 왕국의 복식과 왕실 의례용 기물 등이다. 류큐 국왕의 왕관은 18세기에 제작되어, 국왕이 귀빈을 영접할 때나 설날 등의 공식 행사에 참석할 때 착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려한 장식물과 비녀가 인상적이다. 전통 복장이자 왕실의 평상복인 '빙가타'는 봉황과 모란이 화려한 색으로 어우러져 눈길을 끈다. 붉은 바탕에 화염보주 문양을 류큐 전통기법으로 염색했다. 왕관과 복식 모두 일본 국보로, 이번 전시에서는 개막 후 2주동안만 특별 공개한다.▲ 왕자용 용보주문 빙가타 겹옷. 나하시 역사박물관 소장. 왕자의 복식으로, 붉은색 바탕에 용과 화염보주 문양을 류큐 전통기법으로 염색한 것이 특징이다.이외에도 류큐 왕국과 조선 왕조 사이의 교류와 조선 시대 지식인들의 류큐 왕국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지도와 서적 등 국내에 있는 중요한 기록물들도 함께 전시하여 두 국가 사이의 교류․역사를 보여준다.▲ 왕실 의례용 기물. 나하시 역사박물관 소장. 여성과 국왕의 사적 생활공간인 우치바루에서 축하연 등의 의식에 사용되었던 도구다.전시기간 중에는 류큐 왕국의 역사와 문화, 조선과의 교류에 관한 특별강연회도 준비되어 있다. 특히, 전시 개막 첫날인 오는 9일에는 이번 전시에 유물을 대여해 준 나하시 역사박물관장과 우라소에시미술관장이 직접 류큐 왕국의 역사와 문화에 관해 강연한다. 이와 함께, 오키나와의 전통 공연을 감상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진행된다.전시회는 내년 2월 8일까지 계속된다. 행사에 대한 문의는 국립고궁박물관 전시홍보과(02-3701-7633)로 하면 된다.코리아넷 이승아 기자slee27@korea.kr▲ 천하지도. 국립중앙도서관. 중국의 13성과 조선, 류큐가 그려져 있다. 일본이 그려져 있지 않고, 조선은 류큐국에서 5,430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흑칠 나전 화조문 쟁반. 우라소에시 미술관 소장. 다양한 류큐 왕국의 칠기 제작 기법을 엿볼 수 있다.▲ '이즈미자키에 뜬 달'.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일본 에도시대에 발달한 풍속화인 '우키요에' 화가인 가쓰시카 호쿠사이(1760-1849)가 그린 '류큐 팔경' 중 한 작품이다.▲ "계유년고려장인와장조"명 기와. 우라소에시 교육위원회. 13~14세기. 오키나와에서 발견된 고려계 기와로, 류큐 왕국 성립 이전부터 오키나와와 한반도가 문물을 교류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014.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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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시아 국가간 종자품질 검정기술 교류

    아시아 국가간 종자품질 검정기술 교류

    우리가 즐겨 먹는 방울토마토나 파프리카. 이 종자가 금보다 비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 종자는 비슷한 무게의 금과 비교해 두 세배나 비싸다. 이처럼 종자산업은 부가가치가 높다. 이에 종자의 진위성과 발아율 등 종자성분을 분석할 수 있는 검정기술을 개발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아시아의 종자분야 전문가들이 경북 김천 국립종자원에 모였다. 한국과 아시아 12개국이 참가하는 종자산업 전문가 워크숍이 11월 23일부터 12월 6일까지 2주간 열리고 있다.이번 워크숍에선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종자산업 발전과 우수한 종자의 유통 활성화를 위해 종자품질 검정기술을 공유하고 있다. 프로그램도 종자 샘플링, 발아, 순도, 수분 등 품질검정에 대한 이론과 실습, 품종식별을 위한 유전자분석, 종자병검정 교육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됐다. ▲ 경북 김천 국립종자원에서 열린 종자산업 전문가 워크숍에서 유전자 분석 실습을 하고 있는 참석자들.이번 워크숍은 국립종자원이 종자검정 분야의 전문가를 양성하고 아시아지역 내 종자산업 현황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실시하는 교육사업이다. 국립종자원은 아시아 각국의 종자검정 능력을 높이기 위해 장비와 소프트웨어를 지원해왔으며 이와 함께 2008년부터 본 워크숍을 진행해 현재까지 7회에 걸쳐 14개국 80여명이 참여한 바 있다. 모든 과정은 국제종자검정협회(International Seed Testing Association, ISTA)의 규정에 맞춰 이뤄졌다.국립종자원은 벼, 보리, 콩 등의 생산∙공급과 민간종자 및 국제거래종자의 보증업무를 총괄하는 종자품질보증 기관이다. 지난 7월 김천 이전과 함께 국립종자원 내 설립된 종자검정연구센터는 종자검정 및 새로운 종자개발을 담당하고 있으며 이번 종자산업 전문가 워크숍을 주관했다.4일 열린 워크숍에서는 뉴질랜드에서 온 크레이그 맥길(Craig McGill) ISTA 종자수분위원회 전 회장이 종자의 수분측정 방법을 강연했다. 맥길 전회장은 종자의 산화, 부패, 종자성분의 손실을 방지하면서 수분을 최대한 제거하는 방법을 설명했다. 또 종자샘플 분석을 위한 전제조건과 규정을 설명하고 샘플을 측정할 때 최적온도, 건조방법 및 수분함량 분석 등에 대해 발표했다.▲ 수분측정에 관한 국제규정을 설명하고 있는 크레이그 맥길 (Craig McGill) ISTA 종자수분위원회 전 회장.강연에 이어 실습에 들어간 참가자들은 종자의 수분 검증을 하는 방법과 어떻게 종자 샘플을 다루어야 하는지를 배웠다. 또 시료를 채취하고 공기 중의 수분과 접촉을 최대한 줄이는 방법을 익혔다.이번 워크숍에 참여하고 있는 미얀마의 농림부 소속 재배부장인 쪼 띨하(Kyaw Thiha) 씨는 "전에는 종자를 농부들에게 보급하는 것에 그쳤지만 이번 워크숍에서 종자성분 확인, 순도 측정, DNA분석 등 최첨단 기술을 배웠다"며 "한국의 농업정책에 대해서도 더 많이 알게 됐으며 미얀마에 돌아가서 잘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인터뷰신현관 국립종자원장과 이번 워크숍의 목적과 종자검정센터의 설립취지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이번 종자산업 전문가 워크숍의 목적은 무엇인가? 종자 문제 해결과 관리다. 아시아 각국에서 종자검정 기술공유에 대한 다양한 요청이 있다. 아시아 종자산업 기술과 관리를 위한 전문인력 양성하는 사업이다. 2008년부터 80여명의 공무원들이 이 과정을 수료했다. 한국의 종자검정 제도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연구인력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그리고 종자산업이 어떻게 성장해왔는지를 설명했다. 또 품질 검정, 저장 관리 기술, 규격에 대한 강의가 이뤄졌다. 한국만의 특수한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세계기준에 부응하는 교육을 한다.▲ 종자산업이 중요한 미래산업이라고 강조하는 신현관 국립종자원장.- 국립종자원 내에 종자검정연구센터의 설립목적은 무엇인가? 종자검정 연구센터는 종자를 직접 생산해 농가에 공급한다. 그런데 품질이 일정수준 이상 되는 것만 공급해야 하기 때문에 품질이 유지되는 지를 사전 점검한다. 보급한 이후에도 발아율 품질에 변화가 없는지 사후검증도 한다. 종자 분쟁이 발생했을 때 분쟁 대비 테스트도 실시한다.한국에서 유통되는 모든 종자를 관리하고 신품종 보호, 새로운 품종으로 등록되는 모든 종자를 보관한다. 종자 무역을 할 때 품질 증명서 발급하고 이와 관련된 인력을 양성한다. 종자의 품질에 있어서 건전도(health test)를 검사하고 종자에 병해충이 있는지 확인하는 기능도 있다.- 종자검정연구센터의 중장기 목표는 무엇인가? 현재는 주로 검정, 분석 업무가 대부분이다. 앞으로 연구 기능을 강화할 계획이 다. 종자를 비교∙분석하는 연구 기능을 강화하고 민간과 각국 전문가들을 위한 교육을 확대하려고 한다. 현재 인력을 단계적으로 늘려나갈 계획이다.종자산업은 창조경제와 잘 어울리는 농업부문이다. 종자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종자 소요량이 많은 나라와 기술협력을 해야 한다. 큰 종자업체들은 품질 유지 기능이 잘 갖춰져 있으나 중소규모 업체들은 그렇지 못하다. 이들을 위해 종자 성분 분석, 병리검정을 한다. 이와함께 종자검정연구센터의 소은희 센터장과 그 역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봤다.- 종자검정연구센터의 주요 역할은 무엇인가? 종자검정연구센터는 ISTA 인증실험실 운영과 국제종자분석증명서 발급한다. ISTA 인증실험실이란 국제규정에 따라 종자품질검정을 수행할 능력을 갖춘 실험실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한국에서 종자 수출 기업을 위해 종자품질을 증명하는 증명서(ISTA certificate)를 발급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또 국내 유통되고 있는 종자의 보관과 관리를 책임지고 있다. 현재 약 6백18작물 3만여 종자가 한국에서 유통되고 있다. 이 종자들의 발아율과 품종진위 검정을 실시, 종자품질의 사후관리와 모니터링을 하고 있다.▲ 유전자분석 종자를 들어 보이고 있는 소은희 종자검정연구센터장.품종보호를 출원할 때 재배시험과 DNA분석으로 기존 종자와 유사성을 확인하여 신품종심사를 하기도 한다. 신고 품종과 실제 유통종자와의 동일성여부 검정하고 작물 및 종자에 병원균(곰팡이, 세균, 바이러스 등)의 감염 여부와 병원균 유무를 확인한다.- 종자검정센터의 주요 연구분야와 활용분야는 무엇인가? 종자검정센터는 품종보호출원 심사 시 기존 등록품종에 대한 권리침해가 이루어졌는지 확인하고 출원품종과 기존품종들과의 유사성을 측정한다. 또 병 저항성 품종에 대한 검사를 실시한다.▲ 소은희 종자검정연구센터장이 한국에서 유통되는 3만여 점의 종자가 보관된 냉장실에서 종자관리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분쟁 또는 권리침해 발생시 대상 종자의 유전자분석을 실시해 품종진위를 확인한다. 종자의 건전한 유통을 위해 종자의 발아율, 품종진위를 검사한다.고품질 종자를 생산하기 위해 원종, 보급종 품질관리를 수행한다. 또 종자품질검정 기술을 개발하며 품종 형태적 특성과 DNA프로파일 표준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주요종자의 발아력 및 활력을 검정한다.- 종자검정센터의 어떤 교육활동을 하고 있나? 종자업체, 육종가, 종자관리사, 학생 등 민간을 대상으로 검정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과 함께 아시아국가를 대상으로 종자전문가 인력양성을 위한 전문교육을 실시하고 신품종 심사기술, 유전자 및 병리검정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오는 2015년부터 2017년까지 미얀마에 종자품질검정체계를 구축할 계획이다. 글 사진 임재언 코리아넷 기자jun2@korea.kr ▲ 경북 김천에 자리잡은 국립종자원 전경▲ ISTA 국제규정에 따라 종자품질검정을 수행할 능력을 갖춘 실험실임을 보여주는 인증서. 2014.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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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수목원, 베트남 혼바지역 최초 식물지 발간

    국립수목원, 베트남 혼바지역 최초 식물지 발간

    ▲ 국립수목원이 3일 발간한 식물지 ;혼바 자연보존지구의 식물상 다양성;베트남 남동부지역의 혼바 자연보존지구에 대한 최초 식물지인 ;혼바 자연보존지구의 식물상 다양성(Floristic Diversity of Hon Ba Nature Reserve);이 발간됐다.국립수목원은 지난 3일 베트남 나트랑에서 출판기념회를 갖고 베트남 생태;생물연구소장, 나트랑지방산림청장 등 현지 전문가 및 관계자들에게 책자를 전달했다.국립수목원은 2011년부터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베트남 생태;연구소와 혼바 자연보존지구에 대한 식물상 연구를 수행해왔으며, 그 동안 3종의 신종과 2종의 미기록종을 발굴하는 성과를 올렸다.▲ 베트남 혼바 자연보존지구에 대한 최초 식물지인 ;혼바 자연보존지구의 식물상 다양성;은 713개분류군에 대해 영어와 베트남어로 발간되었다.혼바지구는 다양한 동;식물이 분포하는 생물다양성이 높은 지역이다. 이번의 식물지는 영어와 베트남어로 제작됐으며 혼바 자연보전지구에서 자생하는 713개 분류군을 다뤘다.국립수목원의 관계자는 ;이번 식물지 발간을 통해 지역 특산식물과 희귀식물을 발굴함으로써 식물다양성 보존의 근거를 마련하였다;면서 ;베트남,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지역에 대해서도 연구를 지속적으로 추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손지애 코리아넷 기자jiae5853@korea.kr 2014.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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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도 맛 보러 “재기재기 혼저옵서(빨리빨리 어서오세요)”

    제주도 맛 보러 “재기재기 혼저옵서(빨리빨리 어서오세요)”

    여행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그 지역 음식을 맛보는 일이다.향토음식으로도 불리는 지역의 음식은 지역 특색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특히 다른 곳에서는 맛 볼 수 없는 음식이 있으며 이는 계절별로도 달리한다.한국에서뿐 아니라 해외에서 오는 여행객들에게도 사랑을 받는 관광지 제주도는 섬 이라는 지형적 특징과 화산암 지질이라는 특색이 더해져 육지에서는 쉽게 찾거나 맛 볼 수 없는 다양한 음식이 있다. 벼 농사가 불가능한 화산암 지질의 척박한 환경을 제주도 사람들은 대체 작물과 풍부한 수산물로 제주도만의 음식 문화를 선사한다.한국의 다른 지역과 같이 제주도도 계절별로 제철음식이 있다. 12~3월에는 한라봉, 5~6월에는 다금바리와 성게, 6~8월에는 한치, 11~2월에는 방어가 제주도의 제철 음식으로 꼽힌다. 식자재들이 풍성하게 넘치는 가을을 넘기고 겨울을 맞이하는 늦은 11월에도 제주도에는 다양한 제철음식과 향토음식이 여행객들의 식욕을 돋게 한다.▲ 제주도 앞 바다에서 해녀가 해산물을 채취 하고 있다. 해녀들이 직접 캔 어패류와 해조류는 제주도 내에서도 최상급 상품으로 인정한다.제주도하면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이 바로 ;해녀;다. 해녀들이 채취하는 다양한 해산물은 싱싱함을 넘어 바다의 생생함을 미각을 통해 전달한다. 해녀들이 채취하는 해산물 가운데서도 제주도에서만 맛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오분자기다. 전복과 닮은 모습에 씹히는 맛도 비슷한 오분자기는 전복에 비해 다소 작고 약간 쌉살한 맛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회, 찜, 구이, 찌개 등 그 조리 방법도 다양한 오분자기는 제주도 내 식당에서도 미리 있는지를 확인해야 할 정도로 귀해졌다.▲ 제주도 방언으로 떡조개라고도 불리는 오분자기는 특유의 식감으로 미식가들에게 인기가 높다. 사진은 오분자기 구이.▲ 제주도를 대표하는 음식 가운데 하나인 성게미역국은 제주도 여행객들에게 가장 사랑 받는 아침식사다.오분자기와 함께 해녀가 전달해 주는 제주도의 맛은 성게미역국과 조개 및 전복 요리다. 제주도에서 꼭 맛 봐야 하는 음식으로 꼽히는 성게미역국은 바다 내음 가득한 미역에 성게 특유의 담백하고 단 맛이 더해져 다른 반찬 없이 밥 한 공기를 간단히 비우게 한다.▲ 제주도의 전복죽과 조개죽은 원재료의 식감이 그대로 살아있다.일반적으로 원 재료의 식감을 쉽게 찾기 어려운 죽요리 마저도 맛 보는 사람을 놀라게 한다. 큰 사발에 나오는 죽 안의 큼지막한 전복과 조갯살의 식감은 죽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한다.▲ 제주도 은갈치는 갈치 가운데 최상품으로 꼽히며 소매점에서 최상품은 한 마리에 50만원을 훌쩍 넘기기도 한다.▲ 해녀가 채취한 어패류들로 끓인 제주도 해물탕은 각각의 특유의 맛과 향이 살아 있고 그 맛이 조화된 국물은 일품이다.제주도에서 맛 볼 수 있는 해산물 요리 가운데 맛을 넘어 시각적으로 가장 즐거운 요리는 갈치와 해물탕이다. 짧지 않은 식당 테이블이 부족한 듯 길게 몸을 눕힌 제주 은갈치 구이는 담백함을 넘어 단맛을 느끼게 해준다. 은갈치 구이와 함께 나오는 해물탕은 색색의 해산물들이 냄비 안의 빈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촘촘히 자리를 잡고 있다. 제주도 딱새우, 전복, 조개, 게, 문어 등 20여 가지 해산물들은 각각의 맛과 향을 맛보는 이에게 그대로 전달한다. 다양한 해산물들을 맛 본 뒤에 국물에 넣고 끓인 라면은 포만감에도 젓가락을 놓지 못하게 한다.▲ 제주도 돼지고기 구이는 기름기가 적으면서도 담백하고 쫄깃쫄깃한 식감으로 식도락가들에게 제주도에서 꼭 맛 봐야 할 음식으로 꼽힌다.해녀로 상징되는 해산물 요리와 함께 제주도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요리가 바로 말고기와 돼지고기 요리다. 한국에서는 옛 부터 ;사람은 한양(서울)으로 보내고 말은 제주로 보낸다;라는 말이 있다. 그 만큼 제주도는 말을 기르는데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말고기는 제주도의 별미로 꼽히지만 가격이 다소 부담스럽기는 하다. 그러나 돼지고기는 부담 없는 가격에 제주도를 찾는 식도락가들이 반드시 맛 보는 음식이다. 사실 제주도 돼지고기 요리에 특별함은 없다. 하지만 고기 자체가 일반 돼지고기와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육질이 단단하며 기름기도 적다. 비계부분은 다른 돼지고기에 비해 쫀득쫀득함이 입안을 즐겁게 한다.▲ 담백한 맛의 제주도 고기국수는 국수골목이 생길 정도로 제주도를 찾는 여행객들에게 인기가 높다.제주도에서 구이와 함께 돼지고기의 맛을 깊이 느낄 수 있는 요리가 바로 ;제주도 고기국수;다. 면에 돼지고기 육수를 넣고 돼지수육을 얹은 ;제주도 고기국수;는 담백하면서도 돼지고기 특유의 누린내가 전혀 없다. 약 100여 년 전부터 먹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제주도 고기국수;는 결혼식에서 하객에게 대접하는 음식으로 제주도에서는 ;잔치국수;로도 불린다. 제주시의 국수골목에 ;제주도 고기국수; 집이 몰려 있으며 24시간 영업하는 곳도 많아 늦은 시간 야식으로 즐기기에도 좋다.▲ 제주관광공사의 서영호 팀장이 제주도 여행과 음식 특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제주관광공사의 서영호 팀장은 ;제주도 대부분의 식당에서는 식사를 마친 손님에게 감귤을 무상으로 나누어 줄 정도로 인심이 좋다;며 ;청정 제주도에서 채취하고 수확한 식자재로 만든 제주도 음식은 그 종류도 다양하고 맛도 최고;라고 말했다. 이어 ;계절별로 다양한 제철음식과 그 음식을 주제로 한 축제에 맞춰 제주도를 찾으면 한 층 더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글;사진 전한 코리아넷 기자hanjeon@korea.kr 2014.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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