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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에 정착한 캐나다 출신 예술가, 폴 카잔더

    서울에 정착한 캐나다 출신 예술가, 폴 카잔더

    서울에 거주하는 캐나다 예술가 폴 카잔더(34)씨는 을지로를 자주 방문한다. 을지로 거리에 있는 수 많은 조명상가들과 상점들 앞에 놓여 있는 조명 전시물로부터 영감을 얻는다.2012년 밴쿠버에서 서울로 이주한 카잔더씨는 영상과 설치작업을 해오고 있다. 지난 여름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작가들의 작품으로 구성된 서울시립미술관의 '유니버설 스튜디오'전에 참가하기도 했다.유목적인 삶을 살아가며 다양한 문화 속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예술가들처럼 카잔더씨도 한국에서 영감을 얻고 자신이 바라본 한국을 예술작품에서 표현하고 있다.▲ 캐나다 출신 미디어;설치미술 작가 폴 카잔더2011년 '미디어시티서울' 전시에 참가한 지인들로부터 서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한국으로 이주한 카잔더씨는 서울이 창작활동을 하기에 훌륭한 도시라며 현재는 서울이 집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카잔더씨는 영상, 사진 등 다양한 매체를 이용해 설치작업을 해왔다. 그는 이렇게 다양한 매체와 소재를 이용하는 이유는 "가장 많은 것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라며 "유연하게 다양한 작업을 할 수 있다. 복잡한 것이나 의문을 표현하기를 좋아하기도 한다"고 말했다.그는 한국의 역사, 사회, 문화에 관심이 많다. 지난해 'The Real DMZ Project'에 참여하면서 비무장지대 근처인 강원도 철원에서 동네 초등학생들을 소재로 작업을 하기도 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건물을 배경으로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촬영하고 분단의 이미지를 대비시킴으로써 전쟁의 기억과 아픔, 그리고 상처를 표현했다.그는 예술이 "세상을 비치는 거울이며 기회이고 책임"이라며 "현실을 재구성하는 방법이고 현실 속의 자신을 되돌아 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자신의 작품을 통해 사람들이 생각할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폴 카잔더씨와 신사동 스튜디오에서 한국에 정착한 이유와 그의 예술세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봤다.- 어떻게 서울에 정착해 예술가로서 활동을 하게 됐나?궁금하기도 했고 필요에 의해서이기도 했다. 세계 곳곳을 탐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서 여기에 정착했다. '미디어시티서울' 전시에 참가했던 친구들로부터 서울에 대한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한국 영화나 역사, 한국전쟁, 분단상황에 대해 좀 알고 있었다. 한국 영화에도 관심이 많았다. 최근 한국영화인들이 훌륭한 영화들을 많이 만들어내고 있다.- 뉴욕, 도쿄 등에서 작업을 해왔는데 서울에서의 창작활동은 어떤가?서울은 창작활동을 하기에 정말 흥미롭고 훌륭한 도시이다. 재료에 대해 구상하기에도, 문화와 정치적인 면에서도 그렇다. 도쿄와 뉴욕에서는 소규모 작업을 했지만 몇 개월만 머물렀다. 이들 도시에 비교하면 서울은 집처럼 느껴진다. 뉴욕이나 도쿄에 정착할 생각은 한번도 해 본적이 없다.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잠시 머물렀을 뿐이다.어떤 곳에 정착한다는 것은 방문하는 것과는 확연히 틀리다. 어떤 도시를 방문을 할 때는 박물관이나 갤러리 등 가는 곳이 일정하다. 하지만 어떤 곳에 기반을 두면 그 곳에 대해 속속히 알게 된다. 그 도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고 도시의 낯선 곳을 탐험할 수 있다.▲ 폴 카잔더씨는 자신이 어떻게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결정을 내려 기쁘다고 말했다.- 어떻게 예술가의 길을 걷게 됐나? 자신이 예술가의 길을 걷는데 영향을 준 사람은?어려운 질문이다. 예술가의 역할은 문화와 사회와의 관계에 의해서 정의된다. 어렸을 때는 낯선 문화에 대해 궁금하기도 했다. 예술가는 경쟁이나 생존의 문제에 대해 덜 민감하다. 노동의 경제적인 관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어렸을 때 그림을 그리면 사람들은 내가 재능이 있다고 말했다. 이런 점이 나의 자아를 형성하는데 도움이 됐다. 미술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좀 더 현실적인 관점에서 나를 바라보게 됐다. 18세 때의 예술활동과 34살이 되었을 때의 예술활동은 다를 수 밖에 없다. 나의 예술에 대한 관점은 그 때 이후로 크게 달라졌다. 사실 내가 왜, 언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그런 결정을 내려서 매우 기쁘고 지금도 예술활동을 계속 하고 있다.내가 예술가의 길을 걷는데 영향을 준 사람들이 몇 명 있다. 2008년 내가 학부에 있을때 쥬디 리듈(Judy Radul) 교수를 만났다. 그는 예술적인 감각이 뛰어났고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도 깊은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가 일하는 방식이나 그가 자신의 작품을 구상하는데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제자-선생님의 관계로 만났지만 나중에는 좋은 친구가 됐다.- 미술의 여러 분야 중 미디어아트, 설치미술을 선택한 이유는?대체로 나의 작품을 볼 때 재료나 시간의 관점에서 본다. 대부분의 경우 영상물이 포함된다. 영상물로 정말 독특한 작업이 가능하다. 소리, 공간, 언어 등 여러 요소가 동시에 발생한다. 영상물에서는 사람들은 동시에 보고, 말하고 듣는다. 이러한 조각들이 나중에 하나가 된다. 내가 예술활동을 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그 작품에 대해 생각을 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많은 시간과 공을 기울인다. 사전조사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무언가를 발견하면 그것이 계기가 되고 작업을 시작한다.▲ 신사동 스튜디오에서 사진 촬영을 가진 폴 카잔더- 회화, 조각, 비디오 등 다양한 소재와 장르를 이용해 창작활동을 하는 이유는?미디어아트나 설치미술에서는 다양한 작업을 할 수 있다. 다양한 소재, 이미지, 시간 등을 결합할 수 있다. 영상과 소리는 인생을 표현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이러한 모든 것이 미술에서 일어날 수 있다. 언제 작품이 완성;고정이 되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지하철을 타면 사방에서 LCD스크린을 볼 수 있다. 미디어는 이러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모든 사람들은 사물에 대해 각기 다른 방법으로 사물에 접근한다. 씨에이 콘라드 (CA Conrad)라는 훌륭한 시인이 있다. 그는 하나의 시가 있어도 천 명의 사람들이 읽으면 천 개의 시가 있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 지식, 믿음 등이 합쳐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관람객들 중에서 마음을 열고 작품을 바라보면서 정말 놀라운 논평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고 그 작품에서 자신과 연관되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미술전시에서 볼 수 있는 가능성이다. ▲ 폴 카잔더씨가 지난해 참여했던 'The Real DMZ Project'. 철원군의 초등학생들을 소재로 다양한 매체를 이용한 작업을 했다. (사진: 폴 카잔더)- DMZ 근처의 강원도 철원군에서 벌어진 'Real DMZ 프로젝트'에 참여해 철원군의 초등학생들을 모아놓고 작품을 만든 적이 있다.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나?DMZ 프로젝트는 아주 특별한 의미의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 작품을 만드는 동시에 내가 가지고 있던 의문에 대답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DMZ를 여러 번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이 작품의 메시지는 상당히 복잡하다. 한국전쟁은 대규모로 일어난 폭력과 잔악행위라고 볼 수 있다. 전쟁은 심리적인 상처를 남기고 철원에서 이런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전에 내가 한국전쟁에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교과서, 영화, 다큐멘터리 등에서 배운 것 뿐이었다.철원에서 자란 아이들과 함께 작업하고 싶었다. 이들은 스마트폰을 이용하고 요즘 한국아이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이 동네에서는 탱크가 지나다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었다. 현실과 너무 가까이 있었다. 아이들에게 자유가 자신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지원을 받아 창동 '국제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International Artists Residency Program)에 참여한 적이 있다. 어떻게 이런 기회를 갖게 됐으며 이 프로그램에서 얻은 것은 무엇인가?전세계의 미술가들과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지원했다. 한국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최고의 기회를 제공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한 국가의 미술가들과만 일할 수 있는데 한국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한국과 외국 미술가들이 적절히 섞여 있다.어느 예술가에게나 서울에서 작업하는 것은 정말 좋은 기회다. 나는 한 곳에 기반을 두고 작업을 한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여행을 많이 다니면서 한때 어딘가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느낌을 잃어버렸다.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대규모의 작업을 할 수 있는 기회기도 하다. 다른 곳에서는 그렇게 큰 작품을 만들기 어려웠을 것이다. ▲ 서울시립미술관에 전시된 폴 카잔더의 작품 '전시를 위해 불을 밝히다'(Lights Lit for Show). 을지로 조명상가에서 제작한 전시물을 촬영한 뒤 라텍스에 이미지를 인쇄해 제작했다. (사진: 폴 카잔더)- 올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선보인 '전시를 위해 불을 밝히다'(Lights Lit for Show) 작품에서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이었나?형광등 상자를 촬영해서 인쇄한 것이다. 옥외광고에 자주 쓰이는 방법인데 라텍스에 인쇄한 것이다. 이 작품의 주제는 조명 전시물이다. 서울 을지로의 많은 상점들은 이러한 조명 전시물을 길에 내놓고 장사를 한다. 볼 때마다 흥미로웠고 을지로를 자주 방문하게 됐다.대부분 상점 주인들이 만든 것인데 이들을 촬영하는 것 자체가 재미있었다. 이들은 기이하지만 정말 환상적인 조각품이다. 을지로에는 이러한 조각품들이 즐비했다. 을지로를 정말 좋아하게 된 이유다. 북미에서는 주로 대형체인점인 홈디포에서 이러한 조명들을 구입하는데 을지로는 마치 홈디포가 폭발해 사방에 흩어져 있는 것 같다.- 자신이 가장 관심 있는 주제는 무엇인가? 현재 진행 중이거나 앞으로 계획 중인 프로젝트는?나는 3차원 작품에 관심이 많은데 현재 3차원 요소가 가미된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 나는 내년 8월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리는 뉴폼스페스티벌(New Forms Festival)에 참가할 계획이다. 아마 소리와 결합된 3차원 영상물이 될 것이다.최근에 뉴욕에 갔을때 켄 제이콥스(Ken Jacobs)의 3D작품을 봤다. 정말 경이로웠다. 실험적인 영화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의 3차원 작품도 봤다.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었다. 미디어는 항상 진화하는 것 같다.- 한국의 문화, 역사 등 어떤 것에서 영감을 받나? 영감을 얻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나?주로 독서에서 많은 영감을 얻는다. 을지로는 정말 매력적인 곳이다. 새로운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영감을 준다. 긴장을 풀기 위해 도심외곽에 있는 산에 가기도 한다. 북촌에 살 때는 밤에 창덕궁 담 길을 따라 걷기도 했다. 특히 여름 밤에는 나무가 많아 시원해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버티고개 근처로 이사를 간 후부터는 서울성곽 길을 따라 걷는다. 호텔신라 주변의 야경은 정말 아름답다. 걷는 것은 영감을 얻는 좋은 방법이다.▲ 폴카잔더씨는 서울에 거주하면서 항상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본인에게 한국과 예술은 어떤 의미인가?예술이란 나에게 모든 것이다. 새로운 의문을 자아내는 방법이며 투쟁이며 기쁨이기도 하다. 훌륭한 예술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정직하게 반영한다. 작품은 사람들이 감상하고 이를 보면서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때 의미가 있다. 특히 현대미술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를 되돌아보게 한다. 예술을 접근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오직 사람들만이 예술활동을 한다. 다른 창조물들은 예술활동을 하지 않는다. 예술활동은 한마디로 깨어있다는 것이다.한국은 나에게는 많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밴쿠버에서는 다양한 인종이 거주한다. 하지만 서울 지하철에서는 모두 내가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에게는 유용한 경험이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행동을 하는지 항상 인지하고 있다. 이는 지금까지 당연시해왔던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한국은 그런 점에서 많은 도움이 됐다. 시간을 들여 작품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임재언 코리아넷 기자사진 전한 코리아넷 기자jun2@korea.kr 201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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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4년을 이어온 청량감, 칠성 사이다

    64년을 이어온 청량감, 칠성 사이다

    1955년대~1966년 출생한 베이비붐 세대의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추억 가운데 하나가 소풍, 그리고 소풍 때 먹었던 음식이다. 당시의 추억을 자극하는 가장 일반적인 소풍 도시락은 김에 각종 야채를 돌돌 말아 넣은 김밥과 삶은 계란이었다. 여기에, 시원한 청량감을 더해주는 탄산음료 사이다까지 갖춰지면 완벽한 소풍 도시락의 조합이었다.특히 경제사정이 넉넉지 못 했던 과거, 사이다는 소풍이나 운동회처럼 특별한 날에만 맛볼 수 있는 고급 음료이자 별미였다. 사이다를 넉넉히 먹을 수 있다는 것은 곧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이러한 이유에서 사이다는 아직까지도 50-60대 사이에서 어린 시절의 추억을 자극하는 매개체로 남아 있다.▲ 초록색 유리병에 하얀색 글씨가 돋보이는 '칠성사이다'는 한국을 대표하는 청량 음료다.초록 바탕에 큰 별이 찍힌 용기의 '칠성사이다' 여전히 지금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친근한 한국의 대표적 청량 음료다. 한 모금 마셔보면 먹어보면 레몬과 라임의 향이 입 안에 퍼지고, 달짝지근하면서 톡 쏘는 듯한 자극적인 청량감이 목까지 전해진다. 약품이 넉넉지 않았던 때는 마시면 트림이 나온다고 하여 소화제 대용으로 쓰이기도 했다.▲ 시원하고 상큼한 탄산 음료인 칠성사이다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현재까지 64년 간의 명맥을 이어온 칠성사이다의 역사는 195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에 '탄산음료'란 것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30년대. 주로 일본 제품이었다. 이에 영향을 받아, 이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50년 5월 '동방청량음료' 회사가 '칠성사이다'를 출시했다. 처음엔 창립주주 7명의 성이 각각 다르다는 의미에서 '칠성(性)'으로 이름 지었으나, 이후엔 밤하늘을 밝히는 북두칠성처럼 국내 음료업계를 빛내자는 소망을 담아 칠성(星)으로 의미를 바꿨다.당시, 경쟁사들과의 사이다 경쟁은 치열했다. 해방 직후에 나온 서울사이다, 삼성사이다, 스타사이다 등부터 킨사이다, 해태사이다, 천연사이다를 비롯, 외국에서 온 스프라이트나 세븐업 등 사이다 종류는 넘쳐났다.그러나, 칠성사이다를 상징하는 초록 유리병과 별 모양은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다. 칠성사이다를 만든 동방청량음료는 이후 한미식품공업(1967), 칠성한미음료주식회사(1973)를 거쳐 현재의 롯데칠성음료로 바뀌는 등 많은 변화가 있어왔다. 그러나 고유의 신선하고 맑은 제품 이미지는 꾸준히 사람들의 인식 속에 남아 있으며, '칠성'은 단순한 제품명을 넘어 회사를 대표하는 브랜드로 성장했다.초록색 유리병으로만 생산되던 고급 음료였던 사이다는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페트병과 캔 등 다양한 모양으로 출시되었고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누구나 쉽게 사먹을 수 있는 대중 음료가 됐다.▲ 칠성사이다는 카페인, 인공색소, 인공향료를 쓰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칠성사이다는 2013년 말 기준, 누적 판매량이 185억 병을 기록했고, 사람들이 가장 즐겨 찾는 250ml의 캔의 경우, 연 평균 1억 3천만 개가 판매됐다.칠성사이다를 향한 식지 않는 국민들의 사랑에 대해 롯데칠성 측은 "우수한 물 처리 시설, 레몬과 라임에서 추출한 천연 향, 건강에 좋지 않은 카페인, 인공색소, 인공향료를 모두 빼냈다"는 점을 강조한다.칠성사이다는 단순히 탄산 음료가 아니라 한국인의 생활과 맥을 같이 해 온 '삶의 아이콘'으로 기억되고 있다.글 이승아 코리아넷 기자사진 전한 코리아넷 기자slee27@korea.kr 201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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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년 한국인 여가시간 늘고 노동시간 줄어

    2014년 한국인 여가시간 늘고 노동시간 줄어

    한국인들의 여가 시간은 늘고 노동시간은 줄었으며 주5일 근무제;수업제의 확대가 여가시간 증가에 영향을 준 것으로 나타났다.문화체육관광부가 최근 발표한 '2014 국민여가활동조사'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올 한해 여가를 위해 평일 3.6 시간, 주말 5.8시간을 보내고 평균 13만원의 여가비용을 썼다. 이는 2012년 조사의 평일 평균 3.3시간, 주말 평균 5.1시간과 12만5천원의 여가비용보다 각각 0.3시간, 0.7시간, 5천원이 늘어난 수치다.유형별로 볼 때, 사람들은 휴식활동(62.2%), 취미;오락활동 (21.2%), 스포츠 참여활동(8.5%)의 순으로 여가활동을 즐긴 것으로 나타났다. 2012년에 비해 휴식활동, 취미오락활동, 스포츠 관람활동을 하는 비중은 각각 59.3%에서 62.2%, 20.9%에서 21.1%, 0.9%에서 1.6%로 증가했다.개별 여가활동 형태와 관련, 사람들이 여가 시간에 가장 많이 한 활동은 TV시청(51.4%)이었다. 인터넷 및 SNS(11/5%), 산책(4.5%), 게임(4.0%)이 그 뒤를 이었다. 여성이 남성보다, 연령대가 높을수록 TV시청을 하는 비율이 많았고 남성은 여성에 비해 ;인터넷 검색;, ;게임;을 더 많이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 자료: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관광연구원평균 휴가 일수는 6.0일로 2012년의 5.1일에 비해 0.9일 증가했다.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47.2시간으로 2012년 49.1시간에 비해 1.9시간 줄었다.이 같은 여가 시간 증가에는 주5일 근무제;수업제의 실시가 영향을 미쳤다. 2014년 주5일 근무제 실시 비율은 45.8%로 2012년 36.4%보다 9.4% 늘어났다. 응답자들은 주5일 근무제 이후 생활변화로 가족과 함께 하는 여가시간 증가(45.6%)를 가장 많이 꼽았다. 자기계발 증가(31.5%), 여가 소비 지출 부담 증가(26.0%)가 그 뒤를 이었다.또한 주5일 수업제 이후 여가시간이 늘었다고 답한 학부모의 비율은 39.2%, 학생들의 비율은 16.5%였다. 51.3%의 학생들과 41.9%의 학부모가 주5일 수업제 실시 이후 여가에 대한 만족도가 늘어났다고 답했다.여가 활성화를 위해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부정책과 관련, 사람들은 '여가시설 확충 (63.6%);, ;여가 프로그램의 개발, 보급(61.4%);, ;여가전문인력 양성, 배치(44,8%);, ;소외계층 여가활동 지원(41.8%);을 꼽았다.한편, 한국문화관광연구원에서 실시한 한국인들의 문화여가 행복지수는 평균 70.1점으로 나타났다. 문화여가행복지수란 문화 여가를 통해 어느 정도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가를 수치화한 것이다. 이 지수는 개인여건(여가;비용), 자원(여가시설), 참여(여가활동), 태도(여가에 대한 인식), 만족도(여가생활전반) 등으로 구성됐다.분야별 문화여가행복지수를 보면, 남성(70.5점)이 여성보다 (69.7점), 20대(72.6점)가 70세 이상보다(65.6점) 높았다. 또한 가구 소득 600만 원 이상의 고소득자(73.1점)가 가구 소득 100 만원 미만의 저소득자보다(64.2점) 높았으며, 대도시 거주자(70.6점)가 지방거주자보다(68.2점) 높았다.윤소정 코리아넷 기자arete@korea.kr 2014.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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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전통종이 ‘한지’, 세계와 만나다

    한국전통종이 ‘한지’, 세계와 만나다

    ;견오백지천년(絹五百紙天年);이라는 말이 있다. 비단은 오백년 가는 반면, 한지는 천년의 세월을 견딜 수 있다는 말이다.이런 전통 한지의 우수성을 조명하고, 한지를 세계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가 마련됐다.지난 19일 서울 여의도 63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14 한지세계화 전략을 위한 국제 세미나(The International Seminar on Innovative Traditional Korean Paper, Hanji);는 ;천년한지, 세계와 만나다;라는 주제로 미국,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일본 등 전문용지 관련 전문가들이 모여 한지의 활용방안 및 한지산업의 성장 가능성을 논의했다.▲ 저널리스트 겸 문화역사학자 니콜라스 A. 바스베인스씨가 19일 ;2014 한지세계화 전략을 위한 국제세미나;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세미나는 ;종이의 역사; 저자로 유명한 저널리스트 겸 문화역사학자인 니콜라스 A. 바스베인스(Nicholas A. Basbanes)의 ;거대한 연속성 내에서 한지의 역할;에 대한 기조연설로 시작됐다.바스베인스는 ;한지는 수세기 동안 발명된 수많은 종이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종이로 인정받았다;며 ;한지의 전통과 우수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앞으로도 끊임없이 발전할 만큼의 충분한 잠재력이 있다;고 전망했다.이어 △한지의 서화(書畵)용지 및 고문헌 보수용지로서의 부활을 위하여, △국가별 사례를 통해 본 한지의 가능성, △한지의 세계시장 진출 등을 주제로 총 3세션으로 나뉘어 토론이 진행됐다. ▲ ;2014 한지세계화 전략을 위한 국제세미나;에서 한지의 우수성을 설명하고 있는 이탈리아 플로렌스 국립도서관 도서보존전문가 알렉산드로 시도티(사진 위)씨와 프랑스 국립자료원 보존전문가 로랑 마르탱씨.이탈리아 플로렌스 국립도서관 도서보존전문가인 알렉산드로 시도티(Alessandro Sidoti)는 ;한지는 치수 안전성, 기계적 강도 및 내굴곡성이 높고, 다방면으로 뻗은 섬유질로 인해 결이 생기지 않는 등 뛰어난 품질을 인정받았다;며 ;양피지의 대체물로서 새로운 표지 제작을 위한 대안으로 한지가 주목 받고 있다;고 말했다.프랑스 국립자료원 보존전문가인 로랑 마르탱(Laurent Martin) 역시 한지가 대체 가능한 우수 종이라는 점을 강조했다.그는 ;프랑스 국가자료원은 세계 여러 국가의 기록문서 보존 담당 기관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유형의 문서를 보존함에 있어 큰 난관에 봉착했다;며 ;지난 수십 년 동안 기록문서 보존 기술은 지속해서 진화해왔으며, 동양에서 사용해 온 뛰어난 품질의 종이가 전통적 고문서 보존 자재를 대체할 대안으로 주목을 얻었다;고 말했다.▲ ;2014 한지세계화 전략을 위한 국제세미나;에서 발표에 경청하고 있는 참가자들.손지애 코리아넷 기자jiae5853@korea.kr 2014.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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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유민주주의를 확고하게 지켜낸 역사적 결정”

    “자유민주주의를 확고하게 지켜낸 역사적 결정”

    박근혜 대통령은 20일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에 대해 ;자유민주주의를 확고하게 지켜낸 역사적 결정;이라고 평가했다고 윤두현 홍보수석이 말했다. 윤 수석은 이날 기자들과 만나 위와 같은 박 대통령의 입장을 전했다.이에 앞서 정홍원 국무총리는 19일 ;정부는 통합진보당의 목적과 활동이 대한민국의 민주적 기본질서를 위배했다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밝혔다.정 총리는 이날 발표한 ;통합진보당 정당해산심판 헌법재판소 결정 관련 담화문;에서 ;이번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통합진보당이 폭력을 행사하여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전복하고 최종적으로는 북한식 사회주의를 실현하려 한다는 것이 명백히 확인됐다;며 이같이 말했다.▲ 정홍원(왼쪽) 국무총리와 김종덕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헌법재판소의 결정과 관련해 담화문을 발표하고 있다.이어 ;정부는 통합진보당 해산결정에 따라 관련 법령에 규정된 후속조치를 차질없이 시행하겠다;며 ;이를 위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적극 협조할 것;이라고 설명했다.정 총리는 ;대한민국은 민주적 기본질서를 핵심가치로 하는 법치국가;라며 ;자유민주주의는 우리 국민 모두의 피와 땀으로 지켜낸 숭고한 가치이며 자유와 번영을 가져온 토대;라고 강조했다.또 ;대한민국의 헌법질서를 수호하는 것은 정부의 가장 기본적인 책무;라며 ;정부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훼손하거나 이에 도전하는 어떠한 시도나 행위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이에 단호히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정 총리는 ;이번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우리 사회가 대한민국의 헌법질서를 토대로 하나로 통합되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더욱 굳건해지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위택환 코리아넷 기자사진 국무조정실whan23@korea.kr 2014.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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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 대통령, 혼다•하먼 만나 한미관계 등 논의

    박 대통령, 혼다•하먼 만나 한미관계 등 논의

    박근혜 대통령은 19일 오후 마이클 혼다(Michael Honda) 미국 하원의원을 만나 한・미 관계, 한반도 통일, 동북아 정세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박 대통령은 혼다 의원이 한;미동맹의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 온 점을 평가하고 미 의회가 한;미동맹에 대한 초당적인 지지를 해 주고 있는데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하면서, 한;미동맹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함께 원자력 협력 협정, 전문직 비자 문제 등 한;미 관계 주요 현안이 호혜적으로 진전되어 나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 박근혜 대통령이 19일 청와대에서 마이클 혼다 미국 하원의원과 만나 한미관계와 한반도 통일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이에 대해, 혼다 의원은 한;미동맹은 아;태지역 평화와 안보의 핵심축으로서 민주주의, 시장경제 및 인권 등 보편적 가치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 매우 강력하다면서 굳건한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혼다 의원은 한반도 통일에 관한 박 대통령의 지난 3월 드레스덴 연설은 심오하며 포괄적이었으며, 깊은 온정심이 담겨 있음을 느꼈다고 하고, 신뢰구축을 통한 통일의 길을 제시한 데 대해 높이 평가했다.아울러, 모자보건 사업은 인류 모두 누구든지 어머니의 정성 속에 자라났음을 일깨워주는 것이며, 이산가족 상봉 및 DMZ 세계생태평화공원 등은 통일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데 많은 역할을 하였다고 말했다.박 대통령은 또한 혼다 의원이 지난 9월 한국의 통일구상을 지지하는 연명서한을 보내온 것을 평가하고, 우리 정부가 제의한 여러 가지 인도적 협력 사업은 북한이 호응해 올 경우 빠른 시일 내 이행될 수 있으나, 북한이 신뢰 구축의 길을 외면하고 있어 아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박 대통령은 이어, 미국을 방문한 2007년만 하더라도 위안부 할머니들이 120분 넘게 살아계셨는데, 고령 때문에 지금은 55분만 살아계신다고 하고, 이분들이 살아계실 때 명예를 온전히 회복시켜드리는 것이 도리라고 말했다.아울러, 위안부 문제는 여성 인권에 관한 보편적 가치의 문제로서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문제라면서 시급히 해결되기를 기대한다고 하고, 특히 혼다 의원이 그간 미 의회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헌신적인 기여를 해 온 것을 평가했다.이에 대해, 혼다 의원은 위안부 문제는 현재와 미래의 문제라는데 대해 적극 공감하고, 아;태지역의 화해를 위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책임 인정과 피해 할머니들에 대한 최선의 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 박근혜 대통령이 19일 청와대에서 제인 하먼 미 우드로윌슨센터 소장과 만나 한미관계 발전 방안 등을 논의했다.같은 날, 박 대통령은 제인 하먼(Jane Harman) 미국 우드로윌슨센터 소장을 만나 한・미 관계, 한반도 문제 및 동북아 평화협력구상 등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박 대통령은 하먼 소장의 방한을 환영하면서, 국가 간 관계 발전의 토대는 국민 간 이해와 교류임을 강조하고, 우드로윌슨센터가 지난 수십 년간 한국과 관련한 학술 연구 활동을 해 왔음을 평가하면서 한・미 관계 발전을 위해 보다 많은 기여를 해 줄 것을 당부했다.이승아 코리아넷 기자사진 청와대slee27@korea.kr 2014.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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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퍼시스 쇼룸에서는 다양한 사무가구를 만나 볼 수 있다. 사진 중앙의 검은 의자는 2012년 핵안보 정상회의 당시 정상들이 앉았던 의자다.

    퍼시스, 과학•디자인을 사무가구에 담다

    ▲ 퍼시스 쇼룸에서는 다양한 사무가구를 만나 볼 수 있다. 사진 중앙의 검은 의자는 2012년 핵안보 정상회의 당시 정상들이 앉았던 의자다.;2012 서울 핵안보 정상회의;와 ;2014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참석 정상들, 명문 축구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토트넘 훗스퍼 FC 임직원과 선수들...이들에게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모두 한국 사무가구기업 퍼시스의 제품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 사용된 퍼시스의 ;프로나드;. 최고급 가죽과 인체공학적 디자인이 적용됐다.최근 부산에서 열린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서도 아세안 국가 정상들은 자신들이 앉은 퍼시스 의자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인체공학적 설계에서 오는 편안함과 멋진 디자인에 반한 외국 정상들은 한국의 사무가구 전문기업 퍼시스 제품에 대한 만족감을 숨기지 않았다.퍼시스의 역사는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5년 퍼시스는 철제가구가 주를 이뤘던 기존 한국의 사무용 가구시장에 처음으로 나무와 플라스틱 소재를 도입하며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이후 퍼시스는 사무가구시장의 트렌드를 이끌었다. 1998년에 선보인 L자 모양 책상 ;퍼즐;은 문서작업과 컴퓨터 사용이 동시에 가능하게 설계되어 직장인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기존 직선형태 사무가구에서 탈피, 부드러운 곡선과 다양한 색깔로 만들어진 디자인도 높은 점수를 얻었다. 이 책상은 출시 이후 지난해까지 내수;수출 포함 총 200만개가 팔려 누적 판매 4,011억 원을 돌파한 베스트셀러이다.퍼시스는 지난 30여 년 동안 사무가구업계 1위를 지켜왔다. 국내 1,000대 기업 중 퍼시스가 거래한 회사는 절반이 넘는다. 퍼시스 제품은 인천국제공항, 서울역을 비롯한 KTX 역사, 종합병원, 국립도서관 등에서도 만날 수 있다.▲ 인천국제공항에서도 퍼시스 제품을 만나볼 수 있다.해외에서도 퍼시스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1986년 첫 수출 이후 중동, 중남미 등 세계 40여 개국에 수출했고 지난해 433억 원이 넘는 실적을 올렸다. IBM, 시스코, 소프트뱅크 등 유명 해외기업도 퍼시스 제품을 사용하고 있다.퍼시스 관계자에 따르면 일주일 평균 1팀 이상의 해외 바이어들이 퍼시스 본사;쇼룸을 방문해 구매계약을 상담한다. 지난 18일에는 케냐 중앙은행 관계자들이 퍼시스 쇼룸을 찾았다. 전시된 가구들의 세세한 부분까지 꼼꼼히 확인한 이들은 직접 의자에 앉아봤다. 이들은 ;아주 편안하고 만족스럽다;고 소감을 밝혔다.▲ 18일 퍼시스 쇼룸을 방문한 케냐 중앙은행 관계자들이 사무가구 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18일 퍼시스 쇼룸을 방문한 케냐 중앙은행 관계자가 퍼시스 의자에 앉아 미소짓고 있다.퍼시스가 인기를 누려온 비결은 끊임없는 품질연구와 개발 노력에 있다.퍼시스는 1989년 경기도 안성에 국내 최초로 가구연구소를 세웠다. 이 연구소에서는 가구 자체 기술 연구, 인체공학적 설계뿐만 아니라 기업의 업무형태, 조직 구성 등 사무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 제품을 개발한다. 모든 제품의 자체생산을 원칙으로 하는 퍼시스는 평택, 충주, 음성, 안성 등 5곳에 생산공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철제, 목재, 도장, 의자, 우레탄의 부문별로 세분화, 전문화된 공정으로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경기도 안성의 퍼시스 공장 내부. 이곳에서는 퍼시스 가구의 철제를 전문적으로 생산한다.▲ 퍼시스는 쇼룸을 통해 다양한 사무환경에 사용되는 사무가구를 소개하고 있다. 위의 사진은 중역실의 모습이다.▲ 퍼시스 쇼룸에서는 다양한 사무환경에 맞춘 사무가구를 살펴볼 수 있다.▲ 퍼시스 쇼룸에 연출된 사무실 환경.윤소정 코리아넷 기자사진: 전한 코리아넷 기자, 퍼시스arete@korea.kr 2014.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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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장으로 ok, 교통카드 티머니

    한장으로 ok, 교통카드 티머니

    불과 십 수년 전만 해도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위해 사람들은 각기 다른 결재 수단을 이용해야 했다. 가령, 버스를 탈 때는 동전 모양의 토큰이나 종이 회수권을, 지하철을 탈 때는 지하철 표를 구입했던 것.그러나 2004년을 기준으로, 한국의 교통 문화는 엄청난 전환기를 맞는다. 세계 최초로 도입된 '교통카드' 덕분. 카드 한 장만 있으면 버스든 지하철이든 상관없이 다양한 교통 수단을 자유롭게 이용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특히 올해 6월부터는 지역별로 다르게 사용했던 카드에 대한 제한도 없어져, 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국에서 한 장의 카드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편리함을 누릴 수 있게 됐다.▲ 버스에 탄 승객이 카드를 찍어 요금을 결제하고 있다.한국을 대표하는 교통카드, 한국스마트카드의 '티머니(T-Money)'는 나아가 스마트폰에 프로그램을 탑재해 사용하는 '티머니모바일'와 신용카드로 결제한 후 사용한 만큼 청구하는 '후불청구형' 서비스를 도입해 불편함을 해소했다. 현재, 대중교통 이용자의 티머니 하루 평균 사용률은 수도권에서만 약 4,300만 건, 이용자 수는 1,500만 명에 이른다.교통카드의 장점으로는 편리함도 있지만, 기계에 접촉하는 순간 바로 결재가 이뤄지는 신속성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신속한 시스템의 바탕에는 한국의 빠른 인터넷망, 무선통신망을 비롯해 다양한 소프트웨어 등 정보통신기술이 자리하고 있다. 신용카드의 마그네틱선이 아닌, 라디오주파수(Radio Frequency) 방식을 이용하는 탓에 5cm 정도의 거리상에서도 결재가 가능하며 데이터 처리 용량도 일반 카드보다 2배 정도 빠르다.▲ 한국스마트카드의 티머니는 약 0.5초의 접촉으로 버스 비용 지불이 가능하다.▲ 한국스마트카드는 지난 2007년부터 결제 칩이 내장된 '티머니 액세서리'를 제공하고 있다.이 같은 편리함과 신속성을 인식한 세계 곳곳의 많은 국가가 한국의 교통시스템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들의 관심은 카드를 이용하는 시스템과 인프라를 넘어 교통 정책, 제도 및 운영관리 등에 대한 컨설팅까지 점차 확대되고 있다.처음으로 한국의 교통카드 시스템을 도입한 곳은 뉴질랜드. 지난 2008년 수도인 웰링턴과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오클랜드를 중심으로 이뤄진 교류 사업을 통해, 현재 웰링턴과 오클랜드에 있는 천 여대의 버스와 200여 곳의 유통점은 정산 서비스를 활발히 이용하고 있다.더불어, 말레이시아의 콸라룸푸르와 태국 방콕은 통합정산시스템 구축을 위한 컨설팅을 받은 이후 유통확산 등 꾸준히 자문을 하고 있으며 몽골 울란바토르시는 내년 초 실행을 목표로 자동요금징수시스템, 버스관제시스템, 버스정보안내시스템 등을 구축하고 있는 단계다.콜롬비아 보고타에서 이뤄진 AFC 시스템 구축 및 유지보수 사업은 특히 더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지난 2004년 버스 중앙 차로와 교통카드 도입 등 서울에 새로운 시스템을 가져올 당시, 벤치마킹했던 도시가 바로 보고타였다. 그러나 불과 7년도 지나지 않아 역으로 시스템 구축 관련 컨설팅을 제공하게 된 것. 한국스마트카드 측은 "중남미, 중동 등 기대치 않았던 지역에서도 상담 문의가 이어지는 등 수출 전망이 밝다"고 말했다.이승아 코리아넷 기자사진: 한국스마트카드slee27@korea.kr 2014.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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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산림협력은 아세안에게 희망’

    ‘한국의 산림협력은 아세안에게 희망’

    인도네시아와 캄보디아 두 정상이 지난 11일 ;한-아세안 산림장관특별회의;에서 한국과 아세안국가 간의 산림협력 필요성을 역설했다.▲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지난 11일 부산에서 열린 ;한-아세안 산림장관특별회의;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한국은 1968년부터 인도네시아의 첫 번째 산림분야 협력국가로서 그 의미가 크다;며 ;산림협력을 통한 모두의 번영을 위해 한국과 아세안의 산림협력을 지속적으로 이어가자;고 당부했다.캄보디아의 훈센 총리는 ;산림은 아세안 면적의 50%를 차지하고 있으며, 기후변화에 대응하고 주민 생계와 직결되는 소중한 자원;이라며 ;아시아산림협력기구(Asian Forest Cooperation Organization, AFoCo)를 활용한 한국과 아세안의 산림협력이 6억 아세안인에게 희망을 줄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하자;고 강조했다.▲ 훈센 캄보디아 총리가 지난 11일 부산에서 열린 ;한-아세안 산림장관특별회의;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계기로 열린 산림장관특별회의는 지난 11일 부산에서 열렸다. 한국과 아세안 10개국의 산림부처 장, 차관 및 하디 수산토 빠사리부 아시아산림협력기구(이하 아포코) 사무총장, 레 르엉 밍 아세안사무국 사무총장을 포함한 산림관계자 70여명이 참석했다.▲ 한국과 아세안 산림부처 장, 차관들이 11일 부산에서 열린 ;한-아세안 산림장관특별회의;에 참석,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의 기조연설을 듣고 있다.한국과 아세안 산림장관들은 한-아세안 산림협력 및 구체적 활동을 증진하고, 산림관련 문제들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힘을 모았다. 저탄소, 녹색성장기술 및 기후변화 대응과 관련된 활동 촉진에 대한 지식 및 전문성 공유를 장려하고, 지속 가능한 산림관리와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2016년까지 회원국을 서남, 동북, 중앙아시아로 확대하기로 한 아포코협정의 시기적절하고 효과적인 이행을 위해 계속 협력해 나가기로 했다.이번 회의에서는 아세안 지역의 산림재해 공동대응과 아시아산림협력기구 확대 설립 등을 골자로 한 ;한-아세안 산림장관 선언문;이 채택됐다.글 손지애 코리아넷 기자사진 산림청jiae5853@korea.kr 2014.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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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요한 교수의 ‘4대에 걸친 한국사랑’

    인요한 교수의 ‘4대에 걸친 한국사랑’

    ▲ 세브란스 병원 국제진료센터의 인요한 소장. 이 진료센터는 외국인 환자를 위한 각종 의료서비스를 제공한다. 인 소장은 이곳의 총 책임자이다.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푸른 눈의 금발 머리 교수가 있다.40명의 직원과 70명의 수련의를 진두지휘하는 연세대 의대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 인요한 교수(John A. Linton)가 그 주인공.겉보기에는 전형적인 외국인의 모습이지만 그의 속에는 누구보다 한국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있다. 그 마음의 원천은 100년 넘게 한국에 살며 뿌리내린 그의 조상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아래 줄 왼쪽 아이를 안고 있는 사람은 유진 벨, 윗줄 가운데 모자를 쓰고 서 있는 사람이 알렌이다. 이 두 사람은 미국 북장로교와 남장로교의 대표로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펼쳤다. (사진: 인요한 교수 제공)▲ 인요한 교수의 모친 로이스 린튼(왼쪽, 한국어 이름 인애자)과 부친 휴 린튼(오른쪽, 한국이름 인휴). 인요한 교수는 이 부부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사진: 인요한 교수 제공)인교수의 조상은 119년간 4대에 걸쳐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그의 진외조부 유진 벨(Eugene Bell, 1868~1925) 선교사는 1895년 미국에서 조선에 온 후 전라도 등 남부지역에서 포교활동을 했다. 인교수의 할아버지인 윌리엄 린튼(William Linton)은 유진벨 선교사의 사위이다. 린튼 가문과 벨 가문의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한남대, 대전대를 비롯한 다수의 교육기관과 의료기관을 세우고 결핵환자, 한센병 환자 등 아프고 어려운 이들을 품었다. 이들은 가난, 일제 강점기, 전쟁 등 역사의 아픔을 한국인들과 함께 했다.인 교수의 한국 사랑은 자서전;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2006)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한국인들은 삶이 힘들어도 즐겁고 밝게 살려고 노력하는 낙천적인 사람들;이라며 ;나는 내 피 속에 흐르는 한국인의 기질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나를 키운 8할은 한국 사람들의 뜨거운 정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자신이 의사의 길을 택한 이유에 대해 조상들처럼 ;남들이 잘 가려 하지 않는 길 위에서 내가 가진 재능과 기술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도우려고 노력하고 싶었다;며 ;그것이 선교사 아들로서의 숙명이자 내가 한국 사람에게 받은 사랑의 빚을 갚는 방법;이라고 밝혔다.인 교수는 형 인세반 씨, 유진벨 선교사의 후손들과 유진벨 재단(Eugene Bell Foundation)을 1995년 미국과 2000년 한국에 설립하고 북한에 대한 의료지원 등 인도적 지원 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유진벨 재단은 지난 달 북한에 3주간 방문하며 내년에 평양에 결핵환자 전용 병동 3동을 짓기로 북한 보건성과 합의했다. 인 교수는 현재까지 총 29회 북한을 방문하며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활동을 강조했다. 최근에는 세계인권선언 66돌을 맞아 ;대한민국 인권상; 근정훈장을 받았다.▲ 인요한 교수의 자서전 ;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 (2006) 표지.▲ 인요한 교수(오른쪽)는 지난 10일 제66주년 ;세계인권선언의 날; 기념식에서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으로부터 대한민국 인권상 근정훈장을 받았다. (사진: 연합뉴스)▲ 유년기를 보낸 고향 순천을 떠올리며 미소짓고 있는 인요한 교수. 그는 순천에서 보낸 시간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인요한 교수를 만나 4대째 한국 생활과 대북지원사업, 사회활동 등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 젊은 한국인들도 구사하기 어려운 전라도 토속어를 잘 하신다. 한국인으로서 고향 전라도는 어떤 의미인가?119년 전 유진 벨 선교사가 제물포를 통해 입국한 것이 계기가 되어 4대째 한국과 인연을 맺으며 살고 있다. 조선 말 미국 북장로교와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각각 조선 북부와 남부로 나눠 활동했다. 우리 조상은 그때 남장로교 선교사로 전라도에 오게 됐다.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신 할머니는 전라도에 어마어마한 애착을 갖고 계셨다. 내 부친도 전북 군산 태생이다. 나 역시 전남 순천에서 자랐다. 순천은 내게 우주의 중심이다.- 당신의 선조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했던 한반도의 극심한 어려움도 생생히 겪었으며 전염병이 창궐하는 악조건 속에서 유명을 달리하기도 하고 수많은 고생을 해왔다. 무엇이 1백년이 넘도록 견디게 해왔다고 생각하나?전라도가 우리를 받아줬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우리를 똑같이 대해줬다. 사실 조상들이 조선에 처음 들어왔을 때 열악한 환경, 부족한 물자, 풍토병 등으로 무척 어려웠다. 우리는 한국 사람들과 모든 아픔을 함께 했다. 진외조모 로테 벨은 그때 풍토병으로 30대에 단명하셨다.2009년 한센병 환자 요양시설인 여수의 애양원 총회에 갔을 때 그들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를 들었다. 나는 ;여러분들이 우리가 도움 줄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줘서 일을 할 수 있었다;고 감사하다고 했다. 실제로 나는 한국에게 받은 것이 많은 사람이다. 특별 귀화해서 받은 주민등록증도 감사하게 여긴다. 정말 소중하게 생각한다.- 몇년 전 지리산에 있는 선교사들의 휴양시설에 대한 보존 논란이 있었다. 솔직히 한국사회에 서운하지 않았나?한국에서 딱 한번 서운함을 느낀 일이 그 때다. 일부에서 자연훼손을 이유로 비난했다.그러나 자연훼손은 결코 없었다. 사실 그 지리산 시설은 선교사들이 1900년대 초 풍토병이 창궐하던 시절 6월부터 9월까지 기거하던 곳이다. 그들은 세균과 전염병으로부터 자유로운 지리단 노고단 지역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글을 가르치고 선교를 위해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했다. 당시 이 곳에서 레이놀즈 선교사는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며 한국어 문법체계를 정리했다.정말 서운하고 속상해서 무인도로 가버릴까 생각했다. 그러나 한국인을 떠나고 싶지는 않아서 한국사람이 많이 사는 외국으로 갈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한국을 떠날 수 없었다.- 이방인으로서 느껴온 한국, 한국인의 장점이 있다면? 반대로 문제점은 무엇인가?위기에 강하다. 위기를 대응하는 능력을 정말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꼭 "25시"에 해결하는 것이 특징이다. 위기가 일어나면 서둘러 해결한다기 보다는 마지막 순간에 임박해서 극적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아주 재미있는 특징이다.또한, 개인이 돋보이려는 서양의 가치와 집단과 소속감을 중시하는 동양의 가치를 모두 추구한다. 모든 걸 한 손에 다 넣으려는 의욕적인 사람들이다.인요한 교수는 남북 관계에서 남과 북 모두가 변해야 한다며 특히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남쪽부터 마음을 열 것을 강조했다.- 의료뿐 아니라 남북관계, 사회문제 등에 대해 활발히 발언하고 활동하고 있다. 특히 남북관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한국인 이상이다. 남과 북 당국과 국민에게 어떤 태도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나? 통일은 필연적이다. 어서 통일되어 완전한 ;반도;의 의미를 회복해야 한다. 이를 위해 남과 북 모두가 변해야겠지만 물질적으로 더 여유가 있는 남쪽부터 변할 수 있길 바란다. 특히 조선족, 탈북자에게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 노무현 정부 때 노 대통령에게 중국 동포에게 근로허가와 의료보험을 다 주고 받아들일 것을 건의했다. 그들이 한국에서 받은 좋은 인상과 경험은 북한에 그들의 친척 등을 통해 그대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발 없는 말이 천리길 간다. 나비를 생각해보라. 잡으려고 애쓸 땐 잡히지 않지만 생각지 않을 때에 저절로 어깨에 앉는 나비처럼 그들의 입에서 전달된 한국의 좋은 경험과 인상은 자연스럽게 북에도 퍼질 것이다. 실제로 과거에 비해 조선족에 대한 출입국 신고과정이 많이 바뀌었다. 한국이 그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이고 그들이 그걸 느끼면 거기서 나오는 좋은 말이 퍼져 ;통일이 가깝다;는 것을 다수가 체감할 것이다. - 보수진영 일각에선 그 동안 대북지원을 ;퍼주기;라고 부정적으로 보아왔다. 북한에 대한 지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 먼저 ;퍼주기;라는 말은 잘못 됐다. 절대 결코 퍼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원하는 양은 서독이 동독에 지원했던 양의 60분의 1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남쪽은 1백20만 톤의 쌀을 쌓아두고 동물 사료로 먹이는 걸 고려하고 있다. 북쪽은 사람들이 먹지 못해 죽어가고 있다. 굶어 죽는 것도 죄악이고 인권 침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바람인데 그 절반인 60만 톤 쌀 그냥 북측에 보냈으면 좋겠다. 크게 지원하는 것이 어떤가?6, 7년 전쯤 한참 대규모로 대북지원을 하던 때, 4대의 구급차와 20억 원 어치 물품을 가지고 북한에 갔다. 처음에 길을 나설 때는 의기양양했다. 하지만 평양을 비롯, 원산, 함흥, 청진의 4개 지역 병원에 의료품을 전달할 때마다 내 마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북한에 군 단위의 병원이 250여 개에 달하고 결핵요양시설이 60여 곳이 넘는다. 내가 가지고 간 것은 그들에게 너무나 부족했다.그날 한 해안가에서 모래 한줌을 쥐고 북측 안내원에게 ;내가 가져간 것은 이 한줌의 모래에도 미치지 못한다;며 울었다. 그때 안내원이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통일 후를 생각해보라. 남쪽은 대부분 넉넉하다. 통일이 된 후 북한 사람들이 남쪽에 와서 보고 무엇을 느낄지. 너무 늦기 전에 그들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를 키운 8할은 한국 사람의 뜨거운 정;이었다고 하셨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대전외국인학교에 다니던 10대 시절, 기숙사에서 주말 외출에 입을 옷을 빌리려 한 살 위의 선배 최기호 형 방에 갔었다. 형은 없고 멋진 양복이 한 벌 걸린 것을 봤다. 그 옷을 입고 형의 구두까지 신고 나갔다. 신나게 놀다가 한참 뒤 기숙사로 돌아갈 무렵에서야 내가 형에게 메모도 남기지 않고 옷과 구두까지 신고 간 것이 생각났다. 형이 얼마나 화가 났을까 걱정됐다. 그러나 형 방에 가보니 기호형은 오히려 싱긋 웃고 나를 전혀 혼내지 않았다. 거기서 형의 배려와 정을 크게 느꼈다. ;어차피 입고 간 것, 잘 놀다 와라; 라는.. 이것이 정이구나 싶었다.인요한 교수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한국인들이 ;온돌방의 도덕;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최근 인권상 근정훈장을 받고 여럿 형제와 성장했던 배경과 ;온돌방의 도덕;을 강조하셨다. 외국인의 모습을 가진 한국인으로 자란 성장 과정이 궁금하다. 순천에서 6남매의 막내로 보낸 유년 시절 온돌방에서 군불 쬐며 어른들에게 지혜와 지식, 도덕을 배웠다. 그때 특히 사람 됨됨이 라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배웠다. 남의 허물을 이유로 나의 악행을 면죄부 삼지 않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마음이 오늘날에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준 인물이 있다면 누구인지. 롤모델로 삼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인가?손양원(1902-1950)목사를 들고 싶다. 그는 김구 선생이 학교장 자리를 권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쟁 중에도 피난 가지 않고 교회와 나환자들을 지키다 공산군에게 총살당했다. 두 아들을 공산군에게 잃었지만 자기 아들을 죽인 자를 용서하고 양자로 삼았다. 손 목사는 예수님 다음으로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나의 멘토이자 내 정신의 거울이다.- 평생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다면.65세가 넘으면 고향 순천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고 싶다. 일찍이 대원군도 '지불여순천(地不如順天, 순천만한 고장이 없다는 의미)'이라며 순천의 아름다움을 높이 평가한바 있다. 순천은 그런 곳이다. 은퇴하면 내 고향 순천으로 돌아가고 싶다.- 당신에게 한국은 어떤 의미인가?한마디로 ;정;이다. 정은 서양에서 말하는 세속적인, 남녀간의 사랑에 비할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깊고 큰 의미이다. 정은 상대방의 약점을 감싸주고 장점을 부각시켜주는 것이며, 함께 있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한국은 내게 곧 정과 같다.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 관련 더 자세한 정보는 유진벨 재단의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얻을 수 있다.httP://www.eugenebell.org글 윤소정;이승아 코리아넷 기자사진 전한 코리아넷 기자arete@korea.kr 2014.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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