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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도가 올바른 명칭”

    “독도가 올바른 명칭”

    에드 로이스(공화;캘리포니아) 미국 하원 외교위원장은 6일(현지시간) 한국 동해의 끝에 있는 섬, 독도의 표기와 관련, "올바른 명칭은 독도"(The proper name is Dokdo island.)라고 밝혔다.로이스 위원장은 이날 워싱턴DC 하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장에서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독도 문제는 역사적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밝혔다. ▲ 에드 로이스(공화;캘리포니아) 미국 하원 외교위원장은 6일(현지시간) 워싱턴DC 하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장에서 "독도 문제는 역사적 관점에서 봐야 한다"며 공식 표명했다. 사진 위는 독도의 동도. 아래는 독도의 서도.연합뉴스에 따르면 로이스 위원장은 "미국 지명위원회가 일본 측의 로비에 따라 미국 지도 상의 독도 명칭을 바꾸는 결정을 내린 사실이 2008년 드러났을 때 나는 한;일 강제병합과 독도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됐다"며 "우리는 역사를 이해해야 하고 과거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이해해야 한다"고 밝혔다.이어 그는 최근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 군대 위안부 동원에 강압성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데 대해 "위안부 동원이 강압에 의해 이뤄졌으며 위안부들이 '성노예'(sex slaves)로서의 삶을 살았다는 역사적 기록은 매우 분명하다"며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성노예로 죽어간 위안부 여성들이 많이 실존했음에도, 이를 부정하는 것은 2차 세계대전 때 홀로코스트도 유대인 학살도 없었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공포스럽다"고 지적했다.북한 인권문제에 대해서도 "올해 초 발표된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보고서가 북한인권 관련 입법활동에 많은 지렛대를 주고 있다"며 "인권을 유린한 북한 관리들을 제재대상에 포함하는 대북 금융제재 강화법안(H.R 1771)이 올해 말 하원에 이어 상원에서도 통과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로이스 위원장은 미국의 대북정책 변화 가능성에 대해 "우리는 1994년 제네바 합의 이후 20년간 노력해왔으나 결론을 찾지 못했다"며 "북한 사회에 정보를 유입시켜 북한 주민들과 당국자들의 생각을 바꾸도록 하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고 강조했다.글 사진 위택환 코리아넷 기자whan23@korea.kr 2014.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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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직도 전설은 계속되고 있다

    아직도 전설은 계속되고 있다

    1996년 독일 중부의 소도시 굼머스바흐(Gummersbach). 20대 한국청년이 나타났다. 평범한 동양인의 체형과는 달리 그는 2m3cm의 거대한 체격의 소유자였다. 큰 키에 민첩함과 파워까지 갖춘 그는 독일 핸드볼 분데스리가를 휘저었다. 전무후무한 분데스리가의 전설 윤경신의 전설은 이렇게 시작됐다.1996년 독일무대에 데뷔한 이래 굼머스바흐에서 10시즌, 함부르크에서 2시즌 등 총 12시즌을 뛰며 8차례나 득점왕에 올랐다. 2000-2001시즌에는 324점을 기록, 분데스리가 한 시즌 유일하게 300득점 이상을 달성했다. 지난 2001년에는 국제 핸드볼 연맹으로부터 올해의 핸드볼 선수(IHF Welthandballer)로 선정되었다. 그가 거둔 2,908골은 42년 역사의 분데스리가 통산 최다득점으로 아직도 깨지지 않았다. ▲ 윤경신 현 두산 남자핸드볼팀 감독이 경기도 의정부실내체육관에서 선수들의 연습을 지켜보고 이다.그의 앞을 가로막을 상대는 어디에도 없었다. 국제무대에서도 1995년과 1997년 세계선수권대회와 2004년 아테네올림픽 득점왕에 오르는 등 명실상부 최고의 핸드볼 스타로 코트를 누볐다. 핸드볼 국가대표로 250회 이상 출전하였다. 1990년 베이징부터 2010년 광저우 대회까지 아시안게임 6번, 올림픽은 1996년 애틀랜타 대회를 제외하고 1992년 바르셀로나때부터 지난 2012런던올림까지 5차례나 출전했다.2008년 그는 독일생활을 접고 귀국했다. 30대 후반임에도 그는 타고난 체력으로 2013년 6월까지 자신이 뛴 모든 대회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2013년 9월 코리아리그에서 감독으로서 첫우승을 따냈으며 팀의 5년 연속 우승을 지켜냈다. 어느새 40대 초반에 접어든 그를 만나 핸드볼 인생을 들어봤다.* 윤경신 감독과의 인터뷰▲ 윤경신 감독(왼쪽)이 자신의 핸드볼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독일생활을 성공리에 마치고 귀국했다. 그곳에서 계속 지도자 생활을 할 수 있고 다른 나라에서도 좋은 조건으로 영입하려 했을 텐데, 그걸 마다하고 귀국한 이유는?제의가 있었다. 당시 네 살 난 아들이 있었고 아내도 한국에 돌아가고 싶어 해서 여기서 계속 남느냐 한국에 들어가느냐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 결국에는 가족들 때문에,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오랜 외국생활로 힘든 점도 느꼈기 때문에 귀국하게 됐다.- 농구, 배구를 하지 않고 핸드볼을 선택한 이유는?서울 숭인초등학교 4년 시절 특별활동시간에 핸드볼을 선택하게 됐다. 공을 잡아 보니 희한했다. 농구나 축구공처럼 크지도 않고, 야구나 탁구공처럼 작지도 않은 게 참 어중간했다. 한데 그게 맘에 쏙 들었다. 그 생소하고 특이한 사이즈에 묘한 호기심이 일었고, 손으로 하는 운동이라는 점도 흥미로웠다. 숭덕 초등학교에 핸드볼팀이 창단돼 전학하게 됐다. 그 당시에도 농구, 배구는 굉장히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던 스포츠였고, 핸드볼은 좀 생소했던 종목이라 궁금했다. 핸드볼을 한다고 했을 때 처음엔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머니도 핸드볼 골키퍼 출신이었더라. 어머니는 힘든 핸드볼을 왜 하려고 하느냐며 처음엔 말리셨다.- 최고 득점왕 기록은 아직도 여전한가?2,908골 득점하며 최고 득점왕에 올랐다. 3천 골을 못 넣은 게 조금 아쉽기는 하다. 이 기록이 깨지긴 쉽진 않을 것 같다.- 우월한 신체적 조건이 궁금하다. 집안 내력인가?그렇다. 부모님 모두 키가 크다. 아버지는 181cm, 어머니는 170cm정도 된다. 누나도 175cm다. 동생(윤경민)도 지금은 부상 때문에 은퇴했지만 두산 핸드볼팀에서 활약했다. 집안 자체가 골격과 키가 크다. 선천적으로 몸이 건강하고 골격이 좋다 보니깐 외국선수들과의 몸싸움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부상도 적었고 이런 우월한 신체적 조건 덕분에 해외에서도 오래 활동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굼머스바흐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팀과 지역 주민들은 어떻게 일체감을 갖고 있나?대학교 3학년이었던 1995년 아이슬란드 세계선수권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했다. 그때 굼머스바흐 팀도 출전했고 관계자들도 있어서 나를 눈여겨 본 것이다. 그 당시에 그들에게도 동양인, 그것도 한국인을 영입하는 건 하나의 모험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당시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영입이 가능했던 것 같다. 그렇게 인연이 돼서 굼머스바흐에 들어가게 됐다. 사실 중, 고등학교 때부터 유럽, 특히 독일무대에서 뛰어보는 것이 내 꿈이었다. 막연한 꿈만 가지고 있었는데, 운 좋게도 기회가 왔다. 그때는 돈이고 조건이고 상관하지 않고 무조건 사인했다. 그냥 나는 무조건 간다;고 했다.굼머스바흐는 매우 조그만 도시다. 인구가 적어 핸드볼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핸드볼만 봐도 유럽이 핸드볼 시스템이 활성화 돼있고, 리그도 체계적으로 구성돼 있다.처음에 그곳에서 적응할 때는 많이 힘들었다. 언어소통이 가장 어려웠다. 독일팬들의 지지와 사랑은 엄청난 힘이 됐다. 한국인이라고 직접 담근 김치도 가져다 주기도 했다. 독일인들이 만든 김치가 한국 맛을 낼리 만무하지만 그들의 정성이 너무 감사했다. 독일팬들은 무뚝뚝해 보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보내는 애정은 두터워졌다. 한마디로 말해 그들은 의리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특히 중년, 노년부부들이 보내준 분에 넘친 사랑은 잊을 수 없다.시간이 지나면서 같이 뛰는 선수들과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배우려고 하면서 가까워졌다. 4년 째 되니깐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되더라. 실수를 해도 받아주고 이해해주니깐 자신감이 생기더라. 나는 참 인복이 많은 사람 같다.- 지금까지 가장 인상에 남는 순간은?2007년 함부르크에서 열린 유럽핸드볼연맹(EHF)컵에서 부동의 1위 팀을 꺾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또 굼마스바흐팀 은퇴식 때는 정말 감동적이었다. 그때 2만여 명의 홈팬들이 모였다. 정말 울컥했다. 조촐한 은퇴식을 생각했는데, 그렇게 많은 팬들이 와서 나를 응원해줄지 생각도 못했다. 지금까지 독일팬들과 SNS를 통해서 꾸준히 연락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 경기했을 때도 오신 분들도 있었고, 심지어 내 결혼식 때도 10여 명의 독일팬들이 찾아와 축하해줬다. 너무 고마운 분들이다.- 경희대 박사논문 주제가 ;리더십과 선수들의 자기관리, 팀 문화;다. 당신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리더십이란?어떤 리더십이 옳다고 정의 내리기 쉽지는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선수들과의 소통, 선수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리더십인 것 같다. 동시에 훈련을 할 때는 확실하고 카리스마 있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지도자로서 아직 부족한 점이 많지만 계속 노력하는 중이다.선수들 대부분 중,고등학교 때부터 계속 강압적이고 지도자의 눈치를 보는 운동을 해왔다. 나도 그랬다. 이제는 너무 강압적인 것이 아닌 스스로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려고 한다. 감독이 지시한 대로 그냥 따라 하는 것은 로봇에 불과하다. 지도자가 말을 꺼내기 전에 선수들끼리 서로 의논하고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것. 그런 자율적인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다.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1,2년 안에 이뤄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조금씩 노력하고 있고 그 변화가 조금씩 보이고 있다. 이것이 내가 강조하는 소통의 리더십이다.- 롤모델을 독일대표팀의 하이너 브란트 감독으로 삼았다고 들었다. 그분의 어떤 면이 본받을만한가?하이너 브란트(Heiner Brandt) 감독은 초대 굼마스바흐 감독이었다. 나를 집에도 초대하기도 했고, 당시 독일어를 못했던 나는 한독사전을 갖고 대화를 나누면서 정을 쌓았다. 자상한 아저씨 같은 스타일이었다. 체육관에서는 정말 독하고, 카리스마적인 리더였다. 푸근하지만 일을 할 때는 혹독하게 가르치는 지도자였다. 그런 모습에 나는 그분을 롤모델로 삼았다. 유럽 무대는 프로이기 때문에 어떠한 실수나 건방진 태도에 굉장히 엄격하다. 자유로우면서도 정해진 규칙을 잘 지켜야 하는 곳이 유럽 무대다. 예의를 중시하는 이곳에서 밝은 인사성과 겸손한 태도는 큰 도움이 되었다. 독일의 조직문화와 한국의 유교적인 전통과 예의가 잘 어울렸던 것 같다.▲ 핸드볼은 희로애락을 함께 한 인생의 전부라고 말하는 윤경신 감독- 당신이 생각하는 핸드볼의 매력은?스피드와 몸싸움이다. 핸드볼은 몸싸움을 허락하는 구기종목 중 하나다. 가장 격렬한 운동이 핸드볼이기 때문에, 스피드와 몸싸움 테크닉이 그 스포츠의 가장 큰 매력이다.몸싸움에서 지지 않기 위해 독일에서 10kg이상을 찌웠다. 웨이트 훈련을 통해 몸을 키웠고 몸무게를 110kg이상 불렸다. 서로 간의 기 싸움이 많은 운동이다. 그때 서로 몸을 부딪치고 기 싸움하던 선수들이 지금은 좋은 친구가 됐다. 이 운동 덕분에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요즘도 국제대회에 나가면 지도자로 활동하는 옛 동료들을 만나곤 한다. 시합이 끝난 후 그들과 맥주 한잔을 걸친다. 여러 나라에 친구들이 있다. 한국에서만 활동했다면 이런 친구들을 어떻게 만났을까.▲ 윤경신 감독(왼쪽)과 그가 이끄는 두산 남자핸드볼팀.-당신에게 핸드볼은 어떤 의미인가?핸드볼은 내 인생이다. 계속 직업으로 가지고 있고, 지금까지 살아갈 수 있게 만든 것이 핸드볼 때문이었다. 인생과 같다. 핸드볼에는 희노애락이 있다. 기쁘고 슬플 때도 있고, 이것 때문에 눈물 흘린 적도 있었다.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앞으로 더 해야 할 일들이 있다. 이 운동을 그만 둘 때까지 핸드볼을 좋은 이미지로 가지고 가고 싶다.▲ 윤경신 감독이 독일 굼마스바흐와 함부르크 팬들에게 행운을 비는 메시지.글 위택환, 손지애 코리아넷 기자사진 전한 코리아넷 기자whan23@korea.kr 2014.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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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외학자들과 한글의 흔적을 찾다

    해외학자들과 한글의 흔적을 찾다

    국외에 흩어진 한글 자료를 바탕으로 앞으로의 자료 정리 및 보존을 논의하는 국제 학술 대회가 지난 5일 국립한글박물관에서 열렸다.;국외 학자가 이야기하는 한글, 한글자료;를 주제로 한 이번 학술 대회는 국립한글박물관의 개관을 기념해 국외에 존재하는 한글 자료를 파악하고 한글 연구의 지평을 확장하기 위해 마련됐다. 학술대회에는 국립한글박물관 개관위원회 위원장인 홍윤표 교수를 비롯, 중국과 일본에서 온 학자들이 ;문자․자료로서의 한글;을 주제로 발표했다.▲ 문영호 국립한글박물관장이 5일 국립한글박물관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서 환영사를 전달하고 있다.문영호 국립한글박물관장은 환영사에서 ;한글과 한글로 구축된 우리 문화유산을 잘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이를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며 ;향후 국내외를 망라해 과거 생산된 한글 자료 가운데 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있는 자료를 발굴;조사하는 일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 국립한글박물관 개관위원회 위원장 홍윤표 교수가 '한글에 대한 연구과제'에 대해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한글에 대한 연구 과제;라는 주제로 기조연설을 한 홍 교수는 ;한글은 상당부분 연구가 되어 있다는 인식이 있으나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훈민정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한글;이란 이름은 누가 만들었나? 어떤 변화를 거쳐 한글이란 명칭이 생겼나? 등 의문이 많다;라며 ;이를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다룰 수 있는 깊은 연구가 이뤄지길; 기대했다.▲ 중국에서 온 왕단 교수가 베이징대학에 소장된 한글 문헌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이어, 첫 발제자로 나선 중국 베이징대의 왕단(王丹) 교수는 베이징대학 도서관 고적실에 소장되어 있는 총 23종 55권의 한글 문헌 현황과 가치에 대해 발표했다. 특히,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필사본,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와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 이본 등 다양한 문헌이 남아 있었다;면서 ;앞으로 조사해야 할 도서관 숫자가 많은 만큼 한;중 두 나라 정부와 연구기관의 협력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일본 도야마대의 후지모토 유키오 명예교수가 한글이 지방에 보급된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국립한글박물관)일본 도야마대의 후지모토 유키오(藤本 幸夫) 명예교수는 일본 전역에서 한국학 문헌 자료의 흔적을 찾고 이를 정리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이번 발표에서는 ;천자문;을 중심으로 조선 시대 한글의 지방 보급에 대해 소개했다.후지모토 교수는 ;한글이 1446년 공포되기 전까지는 천자문 훈음을 암송하는 정도에 머물렀으나 한글의 편리성을 인식하면서 세조(1455-1468)부터 성종(1470-1494) 경에 서울을 중심으로 한자본 천자문에 훈음을 달아 전파된 것으로 생각된다;고 밝혔다.▲ 중국 연변대 김광수 교수가 북한과 중국에서 어떻게 한글 자료를 수집, 보존해왔는지 설명하고 있다. (사진 국립한글박물관)중국 연변대의 김광수(金光洙) 교수는 북한과 중국 자료를 중심으로 한글 자료의 수집과 보존 방안에 대해 발표하며 최근 북한의 한글 자료 현황과 보존․관리 방식 등을 소개했다. 김 교수는 "한글 자원의 수집과 정리는 한 나라나 집단에 의해서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한민족의 문화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어깨에 맡겨진 공동한 과업"이라며 "한글의 수집과 정리를 위해 서로 협력하고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이승아 코리아넷 기자slee27@korea.kr 2014.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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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천년 만에 다시 부활한 폼페이

    2천년 만에 다시 부활한 폼페이

    서기 79년 8월24일 베수비우스 화산 폭발로 로마제국의 도시 폼페이는 한 순간에 잿더미가 됐고 미처 탈출하지 못한 주민들은 3.7m 높이의 화산재 아래 파묻혔다. 나폴리 근처 로마의 항구였던 폼페이는 서기 1세기 약 2만 명의 인구의 도시였다. 하지만 화산 폭발 이후 이 도시는 당대의 기록 속에만 살아 있을 뿐, 점차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1738년 우물을 파던 한 농부가 이 도시의 유적을 발견했고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면서 원형 경기장, 두 개의 극장, 상점과 주택이 늘어선 격자 배열의 거리, 프레스코화, 그리고 수많은 벽화들이 발견됐다. 무엇보다도 갑자기 생을 마감한 폼페이 시민들의 형상들도 나왔다.▲ '로마제국의 도시문화와 폼페이' 전시에서는 당시의 화려한 벽화들을 다수 볼 수 있다.2천년전에 사라졌던 폼페이가 되살아났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로마제국의 도시문화와 폼페이' 전시가 9일부터 내년 4월 5일까지 열린다. 이번 전시에서는 폼페이에서 출토된 조각품, 장신구, 벽화, 캐스트(화산재 속 빈 공간에 석고를 부어 당시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한 석고상) 등 2백98건의 다양한 유물들이 선보인다.기원전 80년에 로마제국으로 흡수된 폼페이는 도시 곳곳이 재정비되어 신전과 공공건물, 대저택이 건설됐다. 기원전 70년에 지어진 원형경기장에서는 검투사 경기가, 대극장에서는 연극 공연이 열렸다.▲ 원형경기장에서 벌어진 검투사 경기 때 쓰인 청동 투구폼페이 대저택은 입구를 지나면 집 내부가 보이도록 설계됐다. 집은 지붕이 없는 뜰과 정원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방들이 배치됐다. 각 방의 벽은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들로 장식됐다. 집 안쪽의 정원은 수도 시설과 연결된 분수, 그리고 조각품들이 설치됐다.이번 전시에는 집 내부 벽을 장식한 벽화가 대거 선보인다. 꽃과 나무, 새들이 있는 정원의 그림, 신화 속의 장면과 기둥을 묘사한 벽화에서 폼페이 시민들의 조형감각을 볼 수 있다. ▲ 폼페이의 대저택과 거리 곳곳에 세워진 조각상들폼페이 사람들은 그리스의 신뿐만 아니라, 토착신을 섬겼다. 폼페이 광장에는 주피터와 그의 아내인 주노, 미네르바, 비너스와 바커스 등 여러 신들의 신전이 도시 곳곳에 세워졌다. 집 안에도 사당을 만들어 축복을 기원하였을 정도로 종교의식이 생활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더불어 도시 곳곳에 조각상이 세워졌는데 이번 전시에서도 먹이를 사냥하는 동물들의 조각상을 볼 수 있다.▲ 폼페이에서 발굴된 어린아이 조각상▲ 술의 신인 바커스의 청동상여성들의 장신구는 종류가 매우 다양했지만 당시 남성에게는 반지만 허용됐다. 머리띠, 금으로 된 그물 장식, 다양한 모양의 머리핀이 아직 남아 있으며 목걸이, 팔찌, 반지 등도 발견됐다.당시 폼페이에서 활발한 경제활동이 이루어졌는데 도심 번화가에 즐비하게 늘어선 상점에서 판매한 빵, 와인을 담은 항아리, 저울과 추 등이 발견됐다. 폼페이 유적에서 확인된 화덕과 빵 덩어리로 보아 오늘날과 비슷한 방법으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폼페이에서 발견된 다양한 장신구들.▲ 폼페이유적에서 발굴된 뱀 모양의 팔찌.폼페이에서는 근대적인 형태의 수술 도구들이 발견돼 당시의 의료 기술이 상당히 발달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몇몇 수술 도구는 지금도 사용되고 있을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졌다.폼페이 도시 성벽 외곽에는 무덤들이 많이 확인되고 있는데, 법으로 도시 내에서는 무덤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신은 매장하거나 화장했는데, 타고 남은 재는 유골 항아리에 담겼다.▲ 폼페이에서 사용됐던 수술도구폼페이 시민들의 마지막 모습도 볼 수 있다. 쭈그린 채 손으로 입과 코를 막은 남자, 옷으로 얼굴을 감싼 채 엎드려 죽은 여인, 집안에 묶여 있다가 고통스럽게 죽어간 개의 화석은 당시 비참했던 폼페이의 최후를 말해준다.폼페이 도시 성벽 외곽에는 무덤들이 많이 확인되고 있는데, 법으로 도시 내에서는 무덤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신은 매장하거나 화장했는데, 타고 남은 재는 유골 항아리에 담겼다.▲ 화산 폭발로 희생된 동물과 사람들의 형상.▲ 폼페이 화산 폭발 당시 쭈그린 채로 손으로 입과 코를 막고 있는 숨진 남자의 모습.이번 전시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02) 2077-9000 또는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http://www.museum.go.kr)에서 얻을 수 있다.임재언 코리아넷 기자사진 전한 코리아넷 기자, 국립중앙박물관jun@korea.kr 2014.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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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국가 : 류큐왕국특별전

    독립국가 : 류큐왕국특별전

    서기 1500년 11월 17일 남쪽 먼바다의 섬나라 유구국에서 사신을 보내왔다. 사신은 아래와 같은 글을 조선 국왕에게 전했다.;유구국 중산왕(中山王) 상진(尙眞)은 삼가 조선 국왕 전하께 아룁니다. ;;매양 사신을 파견하여 험한 산을 넘고 먼 바다를 건너 가게 하려고 하였으나, 바다 길을 알지 못하여 막히고 서신 연락이 오랫 동안 끊어져 갈 수 없었습니다;..천만 바라옵건대, 현명하신 왕께서 산해(山海) 같은 아량을 베푸시어 조그만한 정성을 받아들이고, 그 책(대장존경(大藏尊經)을 우리 나라로 가지고와 백성들을 가르치고 깨우쳐 영구히 국가를 안정시키기를 바랍니다.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이 지극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유구국은 일본의 남쪽 끝 오키나와에 존재했던 류큐 왕국을 말한다. 류큐왕국의 의 역사와 문화를 서울에서 볼 수 있는 '류큐 왕국의 보물' 특별전이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이번 특별전의 주제인 류큐 왕국은 15세기에 등장한 독립왕국으로,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주변국인 조선, 중국, 일본과 교류하며 문학, 예술 등 다방면에서 독특한 문화를 꽃피웠다. 17세기 초반에 일본 사쓰마번(薩摩藩)의 침입을 받고, 이후 에도막부(江戶幕府)의 간섭을 받으며 중국과 일본 양측에 조공을 바쳤으며, 이후 1879년 일본 메이지 정부에 의해 병합되어 현재의 오키나와현으로 편입됐다.▲ 류큐 국왕의 왕관. 나하시 역사박물관 소장. 비녀가 함께 꽂혀 있어 눈길을 끈다.이번 전시는 류큐 왕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수준 높은 유물 200여 점을 선보인다. 이 가운데는 일본 국보 33점을 비롯해 중요문화재 6점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류큐 왕실의 상징인 왕관과 왕실 복식, 왕실 의례용 기물 등 류큐 왕국의 통치자 쇼(尙)씨 왕가의 유물과 왕실 칠기, 조선의 영향을 받은 도자기, 류큐 왕국의 역사를 담은 서적과 회화류, 전통 악기 등 다양한 유물이 전시된다. 오키나와현에 있는 나하시역사박물관, 오키나와현립박물관․미술관, 우라소에시미술관, 슈리성관리센터, 우라소에시교육위원회 등 5개 기관을 비롯 도쿄국립박물관, 규슈국립박물관 등 다양한 기관이 전시를 위해 협력했다.눈에 띄는 유물은 류큐 왕국의 복식과 왕실 의례용 기물 등이다. 류큐 국왕의 왕관은 18세기에 제작되어, 국왕이 귀빈을 영접할 때나 설날 등의 공식 행사에 참석할 때 착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려한 장식물과 비녀가 인상적이다. 전통 복장이자 왕실의 평상복인 '빙가타'는 봉황과 모란이 화려한 색으로 어우러져 눈길을 끈다. 붉은 바탕에 화염보주 문양을 류큐 전통기법으로 염색했다. 왕관과 복식 모두 일본 국보로, 이번 전시에서는 개막 후 2주동안만 특별 공개한다.▲ 왕자용 용보주문 빙가타 겹옷. 나하시 역사박물관 소장. 왕자의 복식으로, 붉은색 바탕에 용과 화염보주 문양을 류큐 전통기법으로 염색한 것이 특징이다.이외에도 류큐 왕국과 조선 왕조 사이의 교류와 조선 시대 지식인들의 류큐 왕국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지도와 서적 등 국내에 있는 중요한 기록물들도 함께 전시하여 두 국가 사이의 교류․역사를 보여준다.▲ 왕실 의례용 기물. 나하시 역사박물관 소장. 여성과 국왕의 사적 생활공간인 우치바루에서 축하연 등의 의식에 사용되었던 도구다.전시기간 중에는 류큐 왕국의 역사와 문화, 조선과의 교류에 관한 특별강연회도 준비되어 있다. 특히, 전시 개막 첫날인 오는 9일에는 이번 전시에 유물을 대여해 준 나하시 역사박물관장과 우라소에시미술관장이 직접 류큐 왕국의 역사와 문화에 관해 강연한다. 이와 함께, 오키나와의 전통 공연을 감상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진행된다.전시회는 내년 2월 8일까지 계속된다. 행사에 대한 문의는 국립고궁박물관 전시홍보과(02-3701-7633)로 하면 된다.코리아넷 이승아 기자slee27@korea.kr▲ 천하지도. 국립중앙도서관. 중국의 13성과 조선, 류큐가 그려져 있다. 일본이 그려져 있지 않고, 조선은 류큐국에서 5,430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흑칠 나전 화조문 쟁반. 우라소에시 미술관 소장. 다양한 류큐 왕국의 칠기 제작 기법을 엿볼 수 있다.▲ '이즈미자키에 뜬 달'.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일본 에도시대에 발달한 풍속화인 '우키요에' 화가인 가쓰시카 호쿠사이(1760-1849)가 그린 '류큐 팔경' 중 한 작품이다.▲ "계유년고려장인와장조"명 기와. 우라소에시 교육위원회. 13~14세기. 오키나와에서 발견된 고려계 기와로, 류큐 왕국 성립 이전부터 오키나와와 한반도가 문물을 교류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014.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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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시아 국가간 종자품질 검정기술 교류

    아시아 국가간 종자품질 검정기술 교류

    우리가 즐겨 먹는 방울토마토나 파프리카. 이 종자가 금보다 비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 종자는 비슷한 무게의 금과 비교해 두 세배나 비싸다. 이처럼 종자산업은 부가가치가 높다. 이에 종자의 진위성과 발아율 등 종자성분을 분석할 수 있는 검정기술을 개발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아시아의 종자분야 전문가들이 경북 김천 국립종자원에 모였다. 한국과 아시아 12개국이 참가하는 종자산업 전문가 워크숍이 11월 23일부터 12월 6일까지 2주간 열리고 있다.이번 워크숍에선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종자산업 발전과 우수한 종자의 유통 활성화를 위해 종자품질 검정기술을 공유하고 있다. 프로그램도 종자 샘플링, 발아, 순도, 수분 등 품질검정에 대한 이론과 실습, 품종식별을 위한 유전자분석, 종자병검정 교육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됐다. ▲ 경북 김천 국립종자원에서 열린 종자산업 전문가 워크숍에서 유전자 분석 실습을 하고 있는 참석자들.이번 워크숍은 국립종자원이 종자검정 분야의 전문가를 양성하고 아시아지역 내 종자산업 현황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실시하는 교육사업이다. 국립종자원은 아시아 각국의 종자검정 능력을 높이기 위해 장비와 소프트웨어를 지원해왔으며 이와 함께 2008년부터 본 워크숍을 진행해 현재까지 7회에 걸쳐 14개국 80여명이 참여한 바 있다. 모든 과정은 국제종자검정협회(International Seed Testing Association, ISTA)의 규정에 맞춰 이뤄졌다.국립종자원은 벼, 보리, 콩 등의 생산∙공급과 민간종자 및 국제거래종자의 보증업무를 총괄하는 종자품질보증 기관이다. 지난 7월 김천 이전과 함께 국립종자원 내 설립된 종자검정연구센터는 종자검정 및 새로운 종자개발을 담당하고 있으며 이번 종자산업 전문가 워크숍을 주관했다.4일 열린 워크숍에서는 뉴질랜드에서 온 크레이그 맥길(Craig McGill) ISTA 종자수분위원회 전 회장이 종자의 수분측정 방법을 강연했다. 맥길 전회장은 종자의 산화, 부패, 종자성분의 손실을 방지하면서 수분을 최대한 제거하는 방법을 설명했다. 또 종자샘플 분석을 위한 전제조건과 규정을 설명하고 샘플을 측정할 때 최적온도, 건조방법 및 수분함량 분석 등에 대해 발표했다.▲ 수분측정에 관한 국제규정을 설명하고 있는 크레이그 맥길 (Craig McGill) ISTA 종자수분위원회 전 회장.강연에 이어 실습에 들어간 참가자들은 종자의 수분 검증을 하는 방법과 어떻게 종자 샘플을 다루어야 하는지를 배웠다. 또 시료를 채취하고 공기 중의 수분과 접촉을 최대한 줄이는 방법을 익혔다.이번 워크숍에 참여하고 있는 미얀마의 농림부 소속 재배부장인 쪼 띨하(Kyaw Thiha) 씨는 "전에는 종자를 농부들에게 보급하는 것에 그쳤지만 이번 워크숍에서 종자성분 확인, 순도 측정, DNA분석 등 최첨단 기술을 배웠다"며 "한국의 농업정책에 대해서도 더 많이 알게 됐으며 미얀마에 돌아가서 잘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인터뷰신현관 국립종자원장과 이번 워크숍의 목적과 종자검정센터의 설립취지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이번 종자산업 전문가 워크숍의 목적은 무엇인가? 종자 문제 해결과 관리다. 아시아 각국에서 종자검정 기술공유에 대한 다양한 요청이 있다. 아시아 종자산업 기술과 관리를 위한 전문인력 양성하는 사업이다. 2008년부터 80여명의 공무원들이 이 과정을 수료했다. 한국의 종자검정 제도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연구인력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그리고 종자산업이 어떻게 성장해왔는지를 설명했다. 또 품질 검정, 저장 관리 기술, 규격에 대한 강의가 이뤄졌다. 한국만의 특수한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세계기준에 부응하는 교육을 한다.▲ 종자산업이 중요한 미래산업이라고 강조하는 신현관 국립종자원장.- 국립종자원 내에 종자검정연구센터의 설립목적은 무엇인가? 종자검정 연구센터는 종자를 직접 생산해 농가에 공급한다. 그런데 품질이 일정수준 이상 되는 것만 공급해야 하기 때문에 품질이 유지되는 지를 사전 점검한다. 보급한 이후에도 발아율 품질에 변화가 없는지 사후검증도 한다. 종자 분쟁이 발생했을 때 분쟁 대비 테스트도 실시한다.한국에서 유통되는 모든 종자를 관리하고 신품종 보호, 새로운 품종으로 등록되는 모든 종자를 보관한다. 종자 무역을 할 때 품질 증명서 발급하고 이와 관련된 인력을 양성한다. 종자의 품질에 있어서 건전도(health test)를 검사하고 종자에 병해충이 있는지 확인하는 기능도 있다.- 종자검정연구센터의 중장기 목표는 무엇인가? 현재는 주로 검정, 분석 업무가 대부분이다. 앞으로 연구 기능을 강화할 계획이 다. 종자를 비교∙분석하는 연구 기능을 강화하고 민간과 각국 전문가들을 위한 교육을 확대하려고 한다. 현재 인력을 단계적으로 늘려나갈 계획이다.종자산업은 창조경제와 잘 어울리는 농업부문이다. 종자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종자 소요량이 많은 나라와 기술협력을 해야 한다. 큰 종자업체들은 품질 유지 기능이 잘 갖춰져 있으나 중소규모 업체들은 그렇지 못하다. 이들을 위해 종자 성분 분석, 병리검정을 한다. 이와함께 종자검정연구센터의 소은희 센터장과 그 역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봤다.- 종자검정연구센터의 주요 역할은 무엇인가? 종자검정연구센터는 ISTA 인증실험실 운영과 국제종자분석증명서 발급한다. ISTA 인증실험실이란 국제규정에 따라 종자품질검정을 수행할 능력을 갖춘 실험실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한국에서 종자 수출 기업을 위해 종자품질을 증명하는 증명서(ISTA certificate)를 발급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또 국내 유통되고 있는 종자의 보관과 관리를 책임지고 있다. 현재 약 6백18작물 3만여 종자가 한국에서 유통되고 있다. 이 종자들의 발아율과 품종진위 검정을 실시, 종자품질의 사후관리와 모니터링을 하고 있다.▲ 유전자분석 종자를 들어 보이고 있는 소은희 종자검정연구센터장.품종보호를 출원할 때 재배시험과 DNA분석으로 기존 종자와 유사성을 확인하여 신품종심사를 하기도 한다. 신고 품종과 실제 유통종자와의 동일성여부 검정하고 작물 및 종자에 병원균(곰팡이, 세균, 바이러스 등)의 감염 여부와 병원균 유무를 확인한다.- 종자검정센터의 주요 연구분야와 활용분야는 무엇인가? 종자검정센터는 품종보호출원 심사 시 기존 등록품종에 대한 권리침해가 이루어졌는지 확인하고 출원품종과 기존품종들과의 유사성을 측정한다. 또 병 저항성 품종에 대한 검사를 실시한다.▲ 소은희 종자검정연구센터장이 한국에서 유통되는 3만여 점의 종자가 보관된 냉장실에서 종자관리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분쟁 또는 권리침해 발생시 대상 종자의 유전자분석을 실시해 품종진위를 확인한다. 종자의 건전한 유통을 위해 종자의 발아율, 품종진위를 검사한다.고품질 종자를 생산하기 위해 원종, 보급종 품질관리를 수행한다. 또 종자품질검정 기술을 개발하며 품종 형태적 특성과 DNA프로파일 표준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주요종자의 발아력 및 활력을 검정한다.- 종자검정센터의 어떤 교육활동을 하고 있나? 종자업체, 육종가, 종자관리사, 학생 등 민간을 대상으로 검정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과 함께 아시아국가를 대상으로 종자전문가 인력양성을 위한 전문교육을 실시하고 신품종 심사기술, 유전자 및 병리검정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오는 2015년부터 2017년까지 미얀마에 종자품질검정체계를 구축할 계획이다. 글 사진 임재언 코리아넷 기자jun2@korea.kr ▲ 경북 김천에 자리잡은 국립종자원 전경▲ ISTA 국제규정에 따라 종자품질검정을 수행할 능력을 갖춘 실험실임을 보여주는 인증서. 2014.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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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수목원, 베트남 혼바지역 최초 식물지 발간

    국립수목원, 베트남 혼바지역 최초 식물지 발간

    ▲ 국립수목원이 3일 발간한 식물지 ;혼바 자연보존지구의 식물상 다양성;베트남 남동부지역의 혼바 자연보존지구에 대한 최초 식물지인 ;혼바 자연보존지구의 식물상 다양성(Floristic Diversity of Hon Ba Nature Reserve);이 발간됐다.국립수목원은 지난 3일 베트남 나트랑에서 출판기념회를 갖고 베트남 생태;생물연구소장, 나트랑지방산림청장 등 현지 전문가 및 관계자들에게 책자를 전달했다.국립수목원은 2011년부터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베트남 생태;연구소와 혼바 자연보존지구에 대한 식물상 연구를 수행해왔으며, 그 동안 3종의 신종과 2종의 미기록종을 발굴하는 성과를 올렸다.▲ 베트남 혼바 자연보존지구에 대한 최초 식물지인 ;혼바 자연보존지구의 식물상 다양성;은 713개분류군에 대해 영어와 베트남어로 발간되었다.혼바지구는 다양한 동;식물이 분포하는 생물다양성이 높은 지역이다. 이번의 식물지는 영어와 베트남어로 제작됐으며 혼바 자연보전지구에서 자생하는 713개 분류군을 다뤘다.국립수목원의 관계자는 ;이번 식물지 발간을 통해 지역 특산식물과 희귀식물을 발굴함으로써 식물다양성 보존의 근거를 마련하였다;면서 ;베트남,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지역에 대해서도 연구를 지속적으로 추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손지애 코리아넷 기자jiae5853@korea.kr 2014.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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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도 맛 보러 “재기재기 혼저옵서(빨리빨리 어서오세요)”

    제주도 맛 보러 “재기재기 혼저옵서(빨리빨리 어서오세요)”

    여행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그 지역 음식을 맛보는 일이다.향토음식으로도 불리는 지역의 음식은 지역 특색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특히 다른 곳에서는 맛 볼 수 없는 음식이 있으며 이는 계절별로도 달리한다.한국에서뿐 아니라 해외에서 오는 여행객들에게도 사랑을 받는 관광지 제주도는 섬 이라는 지형적 특징과 화산암 지질이라는 특색이 더해져 육지에서는 쉽게 찾거나 맛 볼 수 없는 다양한 음식이 있다. 벼 농사가 불가능한 화산암 지질의 척박한 환경을 제주도 사람들은 대체 작물과 풍부한 수산물로 제주도만의 음식 문화를 선사한다.한국의 다른 지역과 같이 제주도도 계절별로 제철음식이 있다. 12~3월에는 한라봉, 5~6월에는 다금바리와 성게, 6~8월에는 한치, 11~2월에는 방어가 제주도의 제철 음식으로 꼽힌다. 식자재들이 풍성하게 넘치는 가을을 넘기고 겨울을 맞이하는 늦은 11월에도 제주도에는 다양한 제철음식과 향토음식이 여행객들의 식욕을 돋게 한다.▲ 제주도 앞 바다에서 해녀가 해산물을 채취 하고 있다. 해녀들이 직접 캔 어패류와 해조류는 제주도 내에서도 최상급 상품으로 인정한다.제주도하면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이 바로 ;해녀;다. 해녀들이 채취하는 다양한 해산물은 싱싱함을 넘어 바다의 생생함을 미각을 통해 전달한다. 해녀들이 채취하는 해산물 가운데서도 제주도에서만 맛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오분자기다. 전복과 닮은 모습에 씹히는 맛도 비슷한 오분자기는 전복에 비해 다소 작고 약간 쌉살한 맛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회, 찜, 구이, 찌개 등 그 조리 방법도 다양한 오분자기는 제주도 내 식당에서도 미리 있는지를 확인해야 할 정도로 귀해졌다.▲ 제주도 방언으로 떡조개라고도 불리는 오분자기는 특유의 식감으로 미식가들에게 인기가 높다. 사진은 오분자기 구이.▲ 제주도를 대표하는 음식 가운데 하나인 성게미역국은 제주도 여행객들에게 가장 사랑 받는 아침식사다.오분자기와 함께 해녀가 전달해 주는 제주도의 맛은 성게미역국과 조개 및 전복 요리다. 제주도에서 꼭 맛 봐야 하는 음식으로 꼽히는 성게미역국은 바다 내음 가득한 미역에 성게 특유의 담백하고 단 맛이 더해져 다른 반찬 없이 밥 한 공기를 간단히 비우게 한다.▲ 제주도의 전복죽과 조개죽은 원재료의 식감이 그대로 살아있다.일반적으로 원 재료의 식감을 쉽게 찾기 어려운 죽요리 마저도 맛 보는 사람을 놀라게 한다. 큰 사발에 나오는 죽 안의 큼지막한 전복과 조갯살의 식감은 죽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한다.▲ 제주도 은갈치는 갈치 가운데 최상품으로 꼽히며 소매점에서 최상품은 한 마리에 50만원을 훌쩍 넘기기도 한다.▲ 해녀가 채취한 어패류들로 끓인 제주도 해물탕은 각각의 특유의 맛과 향이 살아 있고 그 맛이 조화된 국물은 일품이다.제주도에서 맛 볼 수 있는 해산물 요리 가운데 맛을 넘어 시각적으로 가장 즐거운 요리는 갈치와 해물탕이다. 짧지 않은 식당 테이블이 부족한 듯 길게 몸을 눕힌 제주 은갈치 구이는 담백함을 넘어 단맛을 느끼게 해준다. 은갈치 구이와 함께 나오는 해물탕은 색색의 해산물들이 냄비 안의 빈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촘촘히 자리를 잡고 있다. 제주도 딱새우, 전복, 조개, 게, 문어 등 20여 가지 해산물들은 각각의 맛과 향을 맛보는 이에게 그대로 전달한다. 다양한 해산물들을 맛 본 뒤에 국물에 넣고 끓인 라면은 포만감에도 젓가락을 놓지 못하게 한다.▲ 제주도 돼지고기 구이는 기름기가 적으면서도 담백하고 쫄깃쫄깃한 식감으로 식도락가들에게 제주도에서 꼭 맛 봐야 할 음식으로 꼽힌다.해녀로 상징되는 해산물 요리와 함께 제주도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요리가 바로 말고기와 돼지고기 요리다. 한국에서는 옛 부터 ;사람은 한양(서울)으로 보내고 말은 제주로 보낸다;라는 말이 있다. 그 만큼 제주도는 말을 기르는데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말고기는 제주도의 별미로 꼽히지만 가격이 다소 부담스럽기는 하다. 그러나 돼지고기는 부담 없는 가격에 제주도를 찾는 식도락가들이 반드시 맛 보는 음식이다. 사실 제주도 돼지고기 요리에 특별함은 없다. 하지만 고기 자체가 일반 돼지고기와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육질이 단단하며 기름기도 적다. 비계부분은 다른 돼지고기에 비해 쫀득쫀득함이 입안을 즐겁게 한다.▲ 담백한 맛의 제주도 고기국수는 국수골목이 생길 정도로 제주도를 찾는 여행객들에게 인기가 높다.제주도에서 구이와 함께 돼지고기의 맛을 깊이 느낄 수 있는 요리가 바로 ;제주도 고기국수;다. 면에 돼지고기 육수를 넣고 돼지수육을 얹은 ;제주도 고기국수;는 담백하면서도 돼지고기 특유의 누린내가 전혀 없다. 약 100여 년 전부터 먹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제주도 고기국수;는 결혼식에서 하객에게 대접하는 음식으로 제주도에서는 ;잔치국수;로도 불린다. 제주시의 국수골목에 ;제주도 고기국수; 집이 몰려 있으며 24시간 영업하는 곳도 많아 늦은 시간 야식으로 즐기기에도 좋다.▲ 제주관광공사의 서영호 팀장이 제주도 여행과 음식 특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제주관광공사의 서영호 팀장은 ;제주도 대부분의 식당에서는 식사를 마친 손님에게 감귤을 무상으로 나누어 줄 정도로 인심이 좋다;며 ;청정 제주도에서 채취하고 수확한 식자재로 만든 제주도 음식은 그 종류도 다양하고 맛도 최고;라고 말했다. 이어 ;계절별로 다양한 제철음식과 그 음식을 주제로 한 축제에 맞춰 제주도를 찾으면 한 층 더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글;사진 전한 코리아넷 기자hanjeon@korea.kr 2014.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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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도희야'로 신인감독상 수상한 정주리 감독

    영화 '도희야'로 신인감독상 수상한 정주리 감독

    '자고 일어났더니 스타가 돼 있더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가장 실감하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 첫 작품 '도희야'로 11월 스톡홀름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신인상을 받은 정주리(34) 감독이다.성균관대 영상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한 정 감독은 첫 장편 시나리오로 영화를 제작해 이러한 행운을 얻었다.정 감독은 영화광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어렴풋이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영화감독의 길을 걷게 됐다.그는 "어릴 때는 피아노를 배우고 피아니스트가 되겠다고 생각했고 그림을 그릴 때는 화가가 되겠다고 생각했다"며 "며 "영화에 그 모든 게 담겨 있었다. 시각미술이면서 음악적인 요소, 철학적인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고 말했다.배우, 스텝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매우 즐겁다는 정 감독은 "큰 보람을 느끼고 희열을 주는 일임에 틀림없다"며 "너무나 매력적인 매체인 영화를 혼자 하지 않고 함께하는 일이고 그 와중에 더 나은 것이 만들어진다"고 설명했다.▲ 관객들과 대화를 나누는 정주리 감독(오른쪽)'도희야'는 작지만 아름답고 조용한 바닷가 마을에서 중학생 소녀 도희(김새론)가 이 마을의 파출소장으로 부임한 영남(배두나)을 만나면서 생겨나는 일을 그렸다. 의붓 아버지인 용하(송새벽)으로부터 학대 받던 도희는 영남을 만나면서 희망을 보았고 영남을 보호하기 위해 극단적을 선택을 하게 된다.이 영화를 본 외신기자들은 "정말 완벽했다. 시나리오, 배우들의 연기 모두 완벽했다"며 "영상도 아름다웠고 다 조화롭게 어우러진 영화였다"고 호평했다.이 같은 평가에 대해 정 감독은 "굉장히 지엽적이고 작은 인물의 내면을 다루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보편성이 있었다"며 "영화 주인공들의 외로움이나 상황들이 외국관객이 보기에도 공감할 만한 여지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영화 '도희야'의 한 장면. 도희 역의 김새론(왼쪽)과 영남으로 출연한 배두나정 감독은 이 시나리오로 CJ 산학협력 프로젝트에 응모했으나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파인하우스 필름의 공동대표인 이창동 감독이 "작은 이야기이지만 큰 의미"를 가진 이 시나리오의 진가를 알아보고 제작을 결정했다. 영국에서 촬영 중이던 배우 배두나도 이 시나리오를 읽은 지 3시간 만에 이 영화에 출연하겠다고 알려왔다.정 감독은 시나리오를 쓰면서 많은 외로움과 좌절감을 맛봤지만 자신이 쓴 이야기, 그리고 영화 속의 주인공들로부터 위로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힘든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그가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라고 밝혔다.정주리 감독과 영화 '도희야'를 만든 배경과 신인감독상을 수상한 소감을 나눠보았다.- 첫 작품 '도희야'로 칸 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됐고 스톡홀름 국제영화제에서는 최우수 신인감독상을 수상했는데 소감은 어떠한가?- 칸 영화제 초청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영화를 완성하자마자 칸에서 첫 공개했다. 영화 상영 내내 오직 아무일 없이 제대로 상영이 되는지 신경 썼다. 박수갈채를 받을 때는 어리둥절해서 실감이 나지 않았다. 2층에서 기립박수를 치는 분들을 보고 그제서야 감동했다. 첫 장편영화를 만들었고 많은 관객들 앞에서 선을 보이는 것도 굉장히 떨리는 경험이었다. 공감하면서 박수를 치는 관객들이 영화를 주의 깊게 봐주신 것을 보고 스스로 놀라고 영화가 굉장히 큰 힘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한국의 현실을 반영하는 영화여서 그렇지 않은가 싶다. 각 나라에서 비슷한 질문을 받았는데 물론 당연히 한국 사회와 저의 문제인식이 당연히 반영돼 있지만 구체적인 현실을 가지고 만든 영화는 아니다. 전적으로 영화를 위해 극화된 내용이다.▲ ;도희야;를 통해 개인적으로도 치유를 받았다고 밝히는 정주리 감독- '도희야'는 가정폭력, 동성애,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문제 등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다. 첫 작품으로 이렇게 무거운 주제를 다룬 이유는?- 시나리오를 쓸 때 어떤 소재나 사건들로부터 접근을 했다기 보다는 도희라는 아이에서 시작했다. 도희는 굉장히 외로운 상황에 처해있었다. 자신이 외로우면서도 외로운 줄도 모르는 상태의 아이를 그려내야 했고 사랑 받지 못한, 버림받은 아이, 이런 설정들이 생겨났다. 오갈 때 없이 떠돌이처럼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의붓아버지와 할머니에게 학대 받은 것이다.출발은 외로움이었고 또 한 사람의 외로운 사람을 등장시켜야 했다. 그게 바로 영남이다. 역시 그녀의 외로움을 가장 극대화시키는 차원에서 다른 요소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 방법으로 남성중심의 사회, 경찰사회를 등장시켰다. 경찰 사회는 엘리트 사회다. 영남은 자기보다 훨씬 나이 많은 부하들을 데리고 있는 외로운 자리에 있었다. 또 동성애자라는 정체성, 외로움을 운명처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상태였다.영남은 도희와는 달리 본인의 외로움에 대해 잘아는 인물이다. 하지만 극복할 수 없어 숨을 수 밖에 없었다. 그 두 사람이 더 이상 도망갈 수 없는 바닷가의 작은 마을에서 만나는 이야기를 그려냈다. 그 마을의 현실을 보면서 이주노동자들을 집어넣었다. 또 그들에게서 외로움이라는 공통의 정서를 발견하게 됐다.▲ 칸영화제에서 사진 촬영을 가진 송새벽, 김새론, 정주리 감독.- 스톡홀름 국제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을 받은 최초의 한국 감독이라고 들었다. 칸과 스톡홀름 영화제에서 주목을 받은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너무나 운이 좋게 칸 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에서 공개를 한 것이 큰 이유다. 칸 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은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문이었고 거기에서 많은 관계자들이 그 영화를 보게 됐다. 이들이 영화를 보고 나서 자국 영화제에 초청한 이유는 한국의 현실을 담고 있어가서가 아닐까 생각했다. 자신들의 삶이 투영된 영화를 보고 외로움에 공감을 했다고 생각했다. 한국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나라에서 공감을 얻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도희와 영남이 함께 길을 떠난다. 이렇게 혹독한 시련을 겪어낸 두 주인공에게 하고 싶은 말은?- 처음부터 영남이 도희를 데리고 떠나는 장면을 결말로 설정했고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너무나 힘든 상황에 처하지만 결말을 그렇게 유도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래서 힘든 과정을 거쳤다. 결말이 하나의 메시지다.어떻게 보면 외면하지 않은 것, 영남이 도저히 외면하지 못하고 도희와 함께 떠나는 것. 우리 주위에 너무나 아픈 마음들, 너무나 힘든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길 바라는 그런 바램으로 영화를 만들었다.영화의 결말은 관객들이 보시는 데로 추측할 수 있기를 바랬다. 영남의 마음을 헤아려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관객들마다 여러 가지 추측을 하면서 영남의 마음으로 결말을 보기를 바랬다. 그 많은 것들이 담기기를 바라는 것이 작가의 포부다. 영남의 입장에서 보면 영남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기로 결심했다. 스스로 외로움을 고수했던 인물이었지만 외로움을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영남이 누군가와 함께 하기로 한 결심한 것이다. 결코 두 사람의 미래가 희망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혼자가 아닌 두 사람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기를 희망하는 마음이었다.내가 만든 인물이지만 내가 위로를 받았다. 어렵고 힘든 때 써나간 이야기였다. 시나리오를 만들기가 힘들었지만 그렇게 만든 시나리오가 영화가 만들어지고 또 영화를 만들면서 배우들과 스텝들에게 많은 위로를 받았다.- 이 영화를 제작할 때 이창동감독의 역할이 컸다고 들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받았나?- 이창동 감독은 이 시나리오가 CJ 산학협력 프로젝트 심사에서 떨어지고 낙담했을 때 불러주신 분이다. 이 감독은 그때 '작은 이야기이지만 큰 의미가 있는 영화가 될 수 있다. 이 영화를 만들어보자'고 말해줬다. 이 영화의 의미를 알아봐주시고 이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게 해 주신 분이다. 프리 프로덕션, 캐스팅, 로케이션 등 준비과정에서 촬영, 마지막 후반 작업할 때까지 세심히 각 단계마다 살펴봐주셨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늘 버팀목이 있다는 안정감을 가지고 일할 수 있었다. 편집과정에서 굉장히 힘들었다. 장편을 만드는 것은 단편과는 정말 달랐다. '정말로 다른 것이구나' 그렇게 느낀 부분이 편집이었다. 모든 장면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두 시간의 이야기에 맞는 호흡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줬다. 어떻게 강약조절을 해야 하는지 등 많은 조언을 해줬다.- 어떻게 영화감독의 길을 걷게 됐나?- 고등학교 2학년 일기장에 '나는 영화감독이 돼야겠다'라고 쓴 것을 보고 깔깔 웃은 적이 있다. 중학교부터 영화 보는 것을 좋아했다. 아버지가 비디오테이프들을 쌓아놓고 보셨다. 그걸 보면서 영화에 익숙해지고 좋아하게 된 샘이다. 중고등학교 때도 영화를 많이 봤고 자연스럽게 결심하게 됐다.대학에서 다양하게 공부를 했지만 친구들과 소모임을 만들어서 단편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캠코더가 보급되면서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영화감독이라는 것이 거창하기 보다는 매우 친숙하게 느껴졌다.▲ ;도희야;는 칸영화제의 '주목할만한 시선'에 초청받았다.- 영화제작은 시나리오 작성에서부터 실제 제작에 이르기까지 길고 어려운 과정을 거친다. 이번 영화제작에서 또 지금까지 영화감독의 길을 걸으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이었나?- 2010년 3월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걱정이 많이 됐다. 시나리오의 초안을 썼다. 그렇게 초안을 써놓고 시간을 보내다가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2012년 8월에 와서였다. 2013년 3월에 시나리오를 완성을 했다. 2010년에 초안을 만들어놓고 이것 가지고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2년을 그냥 보냈다.시나리오를 쓸 때 가장 힘들었다. 암담한 2년이 흘렀다.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상태로 있었다. 첫 장편 시나리오기도 하고 이렇게 인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은 있는데 쉽지는 않고. 그 시간을 견딘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극복을 해야만 나아가는 것이다. 스스로 극복하는 과정이 굉장히 힘들었다.이야기를 완성하는 일이 정말 힘들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야 하는데 사람들, 사건을 만들어내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작가 스스로 높은 기준이 있다. 자신은 스스로 독자이기도 하고 관객이기도 하다. 나의 창작행위는 기대에 받쳐 주지 않았고 굉장히 힘들었다. 어느 순간 포기 할 수 도 있었지만 버티고 하면서 그렇게 지나 온 게 아닌가 싶다.실제 영화를 만들 때는 그 과정들이 너무나 바쁘게 지나갔다. 그렇게 해서 열심히 촬영했는데 편집을 할 때 장편영화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면서 다시 한번 괴로움이 찾아왔다. 나는 뭔가 장편영화를 준비하고 촬영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겠구나 할 때 힘들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좋은 스텝, 배우들을 만나서 정말 행운이었다.▲ 영화 '도희야' 촬영현장에서.- 본인이 생각하는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의 매력은?- 첫 영화를 만들고 영화제작을 하면서 모든 과정을 다 겪어봤다. 스텝과 배우들을 만나고 촬영하고 후반 작업해서 완성하고 개봉하기 위해서 홍보하고 관객들을 만났다. 영화 한편으로 정말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내가 영화 감독이라는 게 좋다고 느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른 사람이 구현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일하면서 더 나은 것이 만들어지는 것이 남다른 기쁨을 준다. 그런 게 매력인 것 같다.- 앞으로 구상중인 작품이 있거나 다루고 싶은 소재가 있다면?지금 쓰고 있는 시나리오를 지난 부산영화제 프로젝트 마켓에서 공개했다. 40대 중반의 여인과 19살의 여자가 두 여인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다. 19살 여자가 주인공이고 그 주변 사람들과 얽히는 관계들. 그것으로 인해 영향 받는 모습들을 묘사하는 이야기를 쓰고 있다. 언젠가는 SF영화를 만들고 싶다. 가장 존재에 대해서 심오하게 이야기하는 장르이다. 우주 속의 인간, 돌연변이, 인간복제 등이 존재론적인 영역으로 느껴진다.임재언 코리아넷 기자사진 임재언, 파인하우스 필름jun2@korea.kr▲ 영화 '도희야'의 포스터 2014.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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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납토성은 5층 높이의 거대한 성벽

    풍납토성은 5층 높이의 거대한 성벽

    한강의 동쪽에 자리잡은 풍납토성(Pungnaptoseong, flat earthen wall, 風納土城)은 삼국시대(The Three Kingdoms of Korea, 三國時代) 한반도에 존재했던 고대국가 백제의 초기 수도로 추정되는 곳이다.그동안 성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구체적으로 파악되지 않았으나 성벽을 컴퓨터 모형화한 결과, 처음 성벽이 건설되었을 때의 높이는 10.8m였고, 두 차례의 증축을 거치면서 최대 13.3m까지 확대되었음이 밝혀졌다. 이는 오늘날 한강 변에 아파트 5층 높이까지 흙을 쌓아 총 3.5㎞ 둘레의 거대한 성벽을 완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 백제 초기의 도읍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가 추진되고 있다. 사진(위)는 풍납토성의 오늘날 모습. 아래 사진은 풍납토성의 축성을 재현한 장면.또 복원된 풍납토성의 규모(체적 704,200㎥)와 중국 당(唐)나라 문헌에 기록된 인부 1인당 하루 작업량(0.51㎥)을 비교했을 때, 풍납토성의 건설에는 연인원(延人員) 138만 명 이상이 투입된 것으로 밝혀졌다.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NRICH), 는 풍납토성의 규모와 조성 공법 등을 규명하기 위해 다양한 학문간의 연구를 추진하였다. 풍납토성은 백제 초기에 건설된 도성의 중요시설로, 그동안 조성 연대와 성격 등은 한국 고고학과 고대사 연구의 중요 쟁점 중 하나로 꼽혀왔다.이번 연구는 지난 2011년에 시작된 동쪽 성벽 발굴조사와 함께 진행되었으며, 축조 연대, 건설 공법, 규모, 투입 인력 등을 밝히기 위해 고고학, 영상공학, 지구물리학, 지리학, 측량학, 토목공학, 토양학, 핵물리학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했다.연구에 따르면 풍납토성 동쪽 성벽은 기원후 3세기 중후반에 착공하여 4세기 중반 이전에 처음 완공되었고, 이후 4세기 말과 5세기 중반 두 차례에 걸쳐 증축되면서 규모가 확대되었다. 성벽의 연대를 밝히기 위한 방사성탄소연대측정(Radiocarbon dating)은 미국과 영국의 전문분석기관에서 했으며, 광자극발광연대(Optically Stimulated Luminescence, OSL)는 국내에서 분석되었다. 특히, 20건 이상의 절대연대 측정 결과를 과학적으로 검증하여 국제적인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성벽의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 지반 조사, 토양 분석, 컴퓨터 모의실험(시뮬레이션) 등이 시행되었다. 이 결과 풍납토성은 한강 변에 있음에도, 매우 단단한 지반에 건설된 것으로 밝혀졌다.문화재연구소는 이처럼 풍납토성은 백제 초기의 국가적 역량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며, 이 초대형 공사의 성공은 한반도 중부의 지역 문화가 새로운 국가사회로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2011년 발굴조사 당시 조사한 성벽은 현재 한성백제박물관에 실제로 전시되어 있으며, 이러한 연구 성과는 내년 초 보고서로 발간하여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글 위택환 코리아넷 기자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 풍납토성의 규모를 정밀 조사하는 연구진들.▲ 풍납토성 조성 당시를 재현한 공사 모형. 2014.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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