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요한 교수의 ‘4대에 걸친 한국사랑’
▲ 세브란스 병원 국제진료센터의 인요한 소장. 이 진료센터는 외국인 환자를 위한 각종 의료서비스를 제공한다. 인 소장은 이곳의 총 책임자이다.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푸른 눈의 금발 머리 교수가 있다.40명의 직원과 70명의 수련의를 진두지휘하는 연세대 의대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 인요한 교수(John A. Linton)가 그 주인공.겉보기에는 전형적인 외국인의 모습이지만 그의 속에는 누구보다 한국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있다. 그 마음의 원천은 100년 넘게 한국에 살며 뿌리내린 그의 조상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아래 줄 왼쪽 아이를 안고 있는 사람은 유진 벨, 윗줄 가운데 모자를 쓰고 서 있는 사람이 알렌이다. 이 두 사람은 미국 북장로교와 남장로교의 대표로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펼쳤다. (사진: 인요한 교수 제공)▲ 인요한 교수의 모친 로이스 린튼(왼쪽, 한국어 이름 인애자)과 부친 휴 린튼(오른쪽, 한국이름 인휴). 인요한 교수는 이 부부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사진: 인요한 교수 제공)인교수의 조상은 119년간 4대에 걸쳐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그의 진외조부 유진 벨(Eugene Bell, 1868~1925) 선교사는 1895년 미국에서 조선에 온 후 전라도 등 남부지역에서 포교활동을 했다. 인교수의 할아버지인 윌리엄 린튼(William Linton)은 유진벨 선교사의 사위이다. 린튼 가문과 벨 가문의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한남대, 대전대를 비롯한 다수의 교육기관과 의료기관을 세우고 결핵환자, 한센병 환자 등 아프고 어려운 이들을 품었다. 이들은 가난, 일제 강점기, 전쟁 등 역사의 아픔을 한국인들과 함께 했다.인 교수의 한국 사랑은 자서전;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2006)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한국인들은 삶이 힘들어도 즐겁고 밝게 살려고 노력하는 낙천적인 사람들;이라며 ;나는 내 피 속에 흐르는 한국인의 기질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나를 키운 8할은 한국 사람들의 뜨거운 정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자신이 의사의 길을 택한 이유에 대해 조상들처럼 ;남들이 잘 가려 하지 않는 길 위에서 내가 가진 재능과 기술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도우려고 노력하고 싶었다;며 ;그것이 선교사 아들로서의 숙명이자 내가 한국 사람에게 받은 사랑의 빚을 갚는 방법;이라고 밝혔다.인 교수는 형 인세반 씨, 유진벨 선교사의 후손들과 유진벨 재단(Eugene Bell Foundation)을 1995년 미국과 2000년 한국에 설립하고 북한에 대한 의료지원 등 인도적 지원 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유진벨 재단은 지난 달 북한에 3주간 방문하며 내년에 평양에 결핵환자 전용 병동 3동을 짓기로 북한 보건성과 합의했다. 인 교수는 현재까지 총 29회 북한을 방문하며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활동을 강조했다. 최근에는 세계인권선언 66돌을 맞아 ;대한민국 인권상; 근정훈장을 받았다.▲ 인요한 교수의 자서전 ;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 (2006) 표지.▲ 인요한 교수(오른쪽)는 지난 10일 제66주년 ;세계인권선언의 날; 기념식에서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으로부터 대한민국 인권상 근정훈장을 받았다. (사진: 연합뉴스)▲ 유년기를 보낸 고향 순천을 떠올리며 미소짓고 있는 인요한 교수. 그는 순천에서 보낸 시간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인요한 교수를 만나 4대째 한국 생활과 대북지원사업, 사회활동 등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 젊은 한국인들도 구사하기 어려운 전라도 토속어를 잘 하신다. 한국인으로서 고향 전라도는 어떤 의미인가?119년 전 유진 벨 선교사가 제물포를 통해 입국한 것이 계기가 되어 4대째 한국과 인연을 맺으며 살고 있다. 조선 말 미국 북장로교와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각각 조선 북부와 남부로 나눠 활동했다. 우리 조상은 그때 남장로교 선교사로 전라도에 오게 됐다.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신 할머니는 전라도에 어마어마한 애착을 갖고 계셨다. 내 부친도 전북 군산 태생이다. 나 역시 전남 순천에서 자랐다. 순천은 내게 우주의 중심이다.- 당신의 선조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했던 한반도의 극심한 어려움도 생생히 겪었으며 전염병이 창궐하는 악조건 속에서 유명을 달리하기도 하고 수많은 고생을 해왔다. 무엇이 1백년이 넘도록 견디게 해왔다고 생각하나?전라도가 우리를 받아줬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우리를 똑같이 대해줬다. 사실 조상들이 조선에 처음 들어왔을 때 열악한 환경, 부족한 물자, 풍토병 등으로 무척 어려웠다. 우리는 한국 사람들과 모든 아픔을 함께 했다. 진외조모 로테 벨은 그때 풍토병으로 30대에 단명하셨다.2009년 한센병 환자 요양시설인 여수의 애양원 총회에 갔을 때 그들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를 들었다. 나는 ;여러분들이 우리가 도움 줄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줘서 일을 할 수 있었다;고 감사하다고 했다. 실제로 나는 한국에게 받은 것이 많은 사람이다. 특별 귀화해서 받은 주민등록증도 감사하게 여긴다. 정말 소중하게 생각한다.- 몇년 전 지리산에 있는 선교사들의 휴양시설에 대한 보존 논란이 있었다. 솔직히 한국사회에 서운하지 않았나?한국에서 딱 한번 서운함을 느낀 일이 그 때다. 일부에서 자연훼손을 이유로 비난했다.그러나 자연훼손은 결코 없었다. 사실 그 지리산 시설은 선교사들이 1900년대 초 풍토병이 창궐하던 시절 6월부터 9월까지 기거하던 곳이다. 그들은 세균과 전염병으로부터 자유로운 지리단 노고단 지역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글을 가르치고 선교를 위해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했다. 당시 이 곳에서 레이놀즈 선교사는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며 한국어 문법체계를 정리했다.정말 서운하고 속상해서 무인도로 가버릴까 생각했다. 그러나 한국인을 떠나고 싶지는 않아서 한국사람이 많이 사는 외국으로 갈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한국을 떠날 수 없었다.- 이방인으로서 느껴온 한국, 한국인의 장점이 있다면? 반대로 문제점은 무엇인가?위기에 강하다. 위기를 대응하는 능력을 정말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꼭 "25시"에 해결하는 것이 특징이다. 위기가 일어나면 서둘러 해결한다기 보다는 마지막 순간에 임박해서 극적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아주 재미있는 특징이다.또한, 개인이 돋보이려는 서양의 가치와 집단과 소속감을 중시하는 동양의 가치를 모두 추구한다. 모든 걸 한 손에 다 넣으려는 의욕적인 사람들이다.인요한 교수는 남북 관계에서 남과 북 모두가 변해야 한다며 특히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남쪽부터 마음을 열 것을 강조했다.- 의료뿐 아니라 남북관계, 사회문제 등에 대해 활발히 발언하고 활동하고 있다. 특히 남북관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한국인 이상이다. 남과 북 당국과 국민에게 어떤 태도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나? 통일은 필연적이다. 어서 통일되어 완전한 ;반도;의 의미를 회복해야 한다. 이를 위해 남과 북 모두가 변해야겠지만 물질적으로 더 여유가 있는 남쪽부터 변할 수 있길 바란다. 특히 조선족, 탈북자에게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 노무현 정부 때 노 대통령에게 중국 동포에게 근로허가와 의료보험을 다 주고 받아들일 것을 건의했다. 그들이 한국에서 받은 좋은 인상과 경험은 북한에 그들의 친척 등을 통해 그대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발 없는 말이 천리길 간다. 나비를 생각해보라. 잡으려고 애쓸 땐 잡히지 않지만 생각지 않을 때에 저절로 어깨에 앉는 나비처럼 그들의 입에서 전달된 한국의 좋은 경험과 인상은 자연스럽게 북에도 퍼질 것이다. 실제로 과거에 비해 조선족에 대한 출입국 신고과정이 많이 바뀌었다. 한국이 그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이고 그들이 그걸 느끼면 거기서 나오는 좋은 말이 퍼져 ;통일이 가깝다;는 것을 다수가 체감할 것이다. - 보수진영 일각에선 그 동안 대북지원을 ;퍼주기;라고 부정적으로 보아왔다. 북한에 대한 지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 먼저 ;퍼주기;라는 말은 잘못 됐다. 절대 결코 퍼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원하는 양은 서독이 동독에 지원했던 양의 60분의 1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남쪽은 1백20만 톤의 쌀을 쌓아두고 동물 사료로 먹이는 걸 고려하고 있다. 북쪽은 사람들이 먹지 못해 죽어가고 있다. 굶어 죽는 것도 죄악이고 인권 침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바람인데 그 절반인 60만 톤 쌀 그냥 북측에 보냈으면 좋겠다. 크게 지원하는 것이 어떤가?6, 7년 전쯤 한참 대규모로 대북지원을 하던 때, 4대의 구급차와 20억 원 어치 물품을 가지고 북한에 갔다. 처음에 길을 나설 때는 의기양양했다. 하지만 평양을 비롯, 원산, 함흥, 청진의 4개 지역 병원에 의료품을 전달할 때마다 내 마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북한에 군 단위의 병원이 250여 개에 달하고 결핵요양시설이 60여 곳이 넘는다. 내가 가지고 간 것은 그들에게 너무나 부족했다.그날 한 해안가에서 모래 한줌을 쥐고 북측 안내원에게 ;내가 가져간 것은 이 한줌의 모래에도 미치지 못한다;며 울었다. 그때 안내원이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통일 후를 생각해보라. 남쪽은 대부분 넉넉하다. 통일이 된 후 북한 사람들이 남쪽에 와서 보고 무엇을 느낄지. 너무 늦기 전에 그들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를 키운 8할은 한국 사람의 뜨거운 정;이었다고 하셨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대전외국인학교에 다니던 10대 시절, 기숙사에서 주말 외출에 입을 옷을 빌리려 한 살 위의 선배 최기호 형 방에 갔었다. 형은 없고 멋진 양복이 한 벌 걸린 것을 봤다. 그 옷을 입고 형의 구두까지 신고 나갔다. 신나게 놀다가 한참 뒤 기숙사로 돌아갈 무렵에서야 내가 형에게 메모도 남기지 않고 옷과 구두까지 신고 간 것이 생각났다. 형이 얼마나 화가 났을까 걱정됐다. 그러나 형 방에 가보니 기호형은 오히려 싱긋 웃고 나를 전혀 혼내지 않았다. 거기서 형의 배려와 정을 크게 느꼈다. ;어차피 입고 간 것, 잘 놀다 와라; 라는.. 이것이 정이구나 싶었다.인요한 교수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한국인들이 ;온돌방의 도덕;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최근 인권상 근정훈장을 받고 여럿 형제와 성장했던 배경과 ;온돌방의 도덕;을 강조하셨다. 외국인의 모습을 가진 한국인으로 자란 성장 과정이 궁금하다. 순천에서 6남매의 막내로 보낸 유년 시절 온돌방에서 군불 쬐며 어른들에게 지혜와 지식, 도덕을 배웠다. 그때 특히 사람 됨됨이 라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배웠다. 남의 허물을 이유로 나의 악행을 면죄부 삼지 않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마음이 오늘날에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준 인물이 있다면 누구인지. 롤모델로 삼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인가?손양원(1902-1950)목사를 들고 싶다. 그는 김구 선생이 학교장 자리를 권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쟁 중에도 피난 가지 않고 교회와 나환자들을 지키다 공산군에게 총살당했다. 두 아들을 공산군에게 잃었지만 자기 아들을 죽인 자를 용서하고 양자로 삼았다. 손 목사는 예수님 다음으로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나의 멘토이자 내 정신의 거울이다.- 평생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다면.65세가 넘으면 고향 순천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고 싶다. 일찍이 대원군도 '지불여순천(地不如順天, 순천만한 고장이 없다는 의미)'이라며 순천의 아름다움을 높이 평가한바 있다. 순천은 그런 곳이다. 은퇴하면 내 고향 순천으로 돌아가고 싶다.- 당신에게 한국은 어떤 의미인가?한마디로 ;정;이다. 정은 서양에서 말하는 세속적인, 남녀간의 사랑에 비할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깊고 큰 의미이다. 정은 상대방의 약점을 감싸주고 장점을 부각시켜주는 것이며, 함께 있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한국은 내게 곧 정과 같다.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 관련 더 자세한 정보는 유진벨 재단의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얻을 수 있다.httP://www.eugenebell.org글 윤소정;이승아 코리아넷 기자사진 전한 코리아넷 기자arete@korea.kr 2014.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