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격변의 시절 환한 빛이 되어 준 2곡의 노래
2014년은 40주년을 맞이하는 역사적인 일들이 많은 해다. 40년 전인 1974년, 서울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됐으며 박근혜 대통령의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암살당한 해이다. 또한 한국 음악에 큰 획을 그은 음악이 탄생한 해이기도 하다.그 당시 한국에는 락 음악과 포크 음악은 접하기 힘든 생소한 장르였다. 레코드판 한 장 가격이 너무나 비쌌던 그때, 사람들은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복사;판을 구해 듣곤 했다. 원본을 오픈릴식 테이프 녹음기에 틀어 값싼 레코드판에 복사해 파는 사업이 번창했다. 그런 값싼 레코드판은 쉽게 부러졌지만 가격 부담이 적어서 음악 애호가들은 대부분 복사판을 구입해 들었다.전축으로 불렸던 오디오기기는 구하기 힘들었다. 전축은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일 뿐이었다. 하지만 음악은 친구들, 그리고 대학생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다. 그 당시엔 노래방이라는 것도 없었다. 노래방은 1980년대 후반에 와서야 생겨나기 시작했다. 노래방은 없었지만 레코드판 음악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음악 다방;이 있었다. 자정이 넘으면 통행을 금지하는 ;야간통행금지;제도 때문에 밤 11시 30분에는 문을 닫아야 했지만, 그전까지는 비싼 레코드판의 가격 걱정 없이 듣고 싶은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1974년 가장 인기 있는 노래 두 곡을 꼽는다면, 하나는 8월에 발매된 신중현의 ;미인;, 또 하나는 한대수의 ;물 좀 주소;이다. 두 곡은 참신함과 독특하고 재미있는 가사로 큰 인기를 얻었다. 정치적인 메시지는 담고 있지 않았지만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는 학생들은 그 노래의 가사를 바꿔 부르기도 했다.신중현의 ;미인;은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록, 펑크록, 사이키델릭 스타일이 엿보이는 음악이다. 한대수의 ;물 좀 주소;는 ;언플러그드로 연주하는; (전자 악기를 사용하지 않는) 포크 록이다. 이 곡은 한국에 포크 록과 ;언더그라운드 록 밴드;를 처음으로 소개한 음악으로 평가되고 있다.전혀 다른 스타일의 뮤지션이 부른 이 두 곡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현대적이면서도 동시에 매우 전통적인 색을 담고 있다. 발매되자마자 큰 인기를 얻었지만 안타깝게도 이 곡들은 당시 정부에 의해 금지곡으로 분류됐다. 음악 애호가들에겐 1974년 어둠의 시절, 환한 빛줄기와 같은 곡이었다.당시 익숙지 않은 록이라는 음악장르를 대중에서 소개한 신중현의 ;미인;은 록과 펑크 록 두 음악적 색깔과 함께 한국의 전통적인 보컬스타일을 담고 있다. 전설적인 펑크 록 밴드 ;팔리아먼트; 혹은 70년대 펑크 락을 연상시키는 듯한 도입부의 베이스 연주가 인상적이다. ;팔리아먼트;의 베이시스트 부치 콜린스의 연주가 한국 락 음악과 만났다고나 할까. ▲ 신중현의 첫 앨범 ;히키-申: 키타 멜로듸; (사진제공: 다음뮤직)이어 신중현은 ;비틀즈;의 헬터 스켈터(Helter Skelter);을 연상케 하는 창법으로 허스키하고 거친 목소리로 첫 소절을 시작한다. ;한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네 소절이 끝나는 순간 신중현의 화려한 기타연주가 시작된다. 감각적인 기타 연주기법으로 베이스와 환상적인 합주를 선보이며 노래를 이어간다. 반주베이스의 솔로 연주 부분에서는 잠시 노래를 멈췄다가 다시 2절로 들어간다.이 곡이 나왔을 때 신중현의 나이는 36세. 그는 한국전쟁(1950-1953) 이후 음악계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20여장의 앨범을 발매했다.1938년 태생인 그에게 전쟁과 가난의 아픔 속에서 음악은 유일한 해방구였다. 1955년, 17살인 신중현은 엘비스 프레슬리를 흉내 내며 기타를 독학했기 시작했다.음악을 하면서 다른 가수들을 위해 작곡한 곡들에 대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사기를 당하는 등 수많은 수난을 겪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은 멈추지 않았다. 록 밴드를 결성하고 다른 가수들을 위한 작곡활동을 하는 등 활발한 음악활동을 펼친다. 또 1959년, 자신의 첫 데뷔앨범 ;히키-申: 키타 멜로듸;를 발매했다.1962년, 그는 한국 최초의 록 그룹 ;에드 포;를 결성하고 1969년에는 영화 ;푸른사과;의 배경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그의 본격적인 음악활동은 1974년부터였다.1974년 8월, 신중현은 밴드 ;신중현과 엽전들;을 결성해 앨범을 내놓았다. 밴드 이름을 그대로 딴 앨범 ;신중현과 엽전들;에 담긴 곡들은 70년대 펑크 록과 1968년의 혁신적인 록 장르를 한국적 록과 결합시킨 ;사이키델릭 록;을 선보였다.그룹의 리드 기타리스트와 보컬을 맡은 신중현과 함께 ;엽전 멤버;로는 베이시스트 이남이, 드럼연주자 김호식이 맡았다. 미국의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가 결성한 밴드와 구성이 비슷하다. 지미 헨드릭스 밴드도 한 명의 리드 기타리스트와 베이시스트 그리고 드럼연주자로 구성됐다. 한 명의 훌륭한 기타리스트가 있으면 다른 리듬 기타리스트 없이도 혼자서 다양한 연주법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던 것이다.;신중현과 엽전들;의 1집 앨범은 처음 발매 당시 500여장 밖에 나오지 않아 한국에 현존하는 아날로그 레코드판 중 가장 값어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그 앨범의 LP판은 1994년에 발매된바 있다.이 앨범은 찾는 사람이 많아 이후 지구레코드를 통해 재 발매됐다. 2차로 찍어낸 앨범에는 김호신 대신 새 드럼연주자 권용남이 등장했다. 지구레코드사는 좀 더 강렬한 스타일을 원했고 신중현은 기존 곡들을 리메이크해 편집음반을 발매했다.▲ 1974년 8월 25일 발매된 신중현의 20번째 앨범이자 그룹 ;신중현과 엽전들;의 첫 데뷔앨범. 이 앨범의 첫 곡으로 ;미인;이 실렸다. (사진제공: 다음뮤직)첫 곡으로 실린 ;미인;은 발매되자 마자 학생들, 젊은이들 사이에서 대히트였다. 이 곡은 1974년 후반부터 1975년까지 라디오에 계속 흘러나올 정도로 팬들의 오랜 사랑을 받았다.1975년 말, 그에게 뜻밖의 청탁이 들어온다.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찬양하는 노래를 만들어달라는 것. 신중현은 망설임 없이 곧바로 거부했다.그러고 나서 곧바로, 한국 땅의 아름다움과 자연의 아름다움, 그리고 전 세계의 ;평화;를 염원하는 ;아름다운 강산;을 작곡했다.1975년 12월에는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됐고 이후 2년간 정신병원에 감금됐다. 1977년 풀려났을 때 그의 곡들은 여전히 금지곡으로 분류돼 있었고, 발라드와 댄스곡들이 인기를 얻으면서 록 음악은 대중으로부터 외면을 받고 있었다.▲ 1974년 공연을 하고 있는 신중현과 엽전들. (왼쪽부터) 베이시스트 이남이, 드럼연주자 김호식, 그리고 리드 기타리스트 겸 보컬리스트 신중현. (사진제공: Bing Images)신중현과 함께 1974년 한국음악에 큰 변화를 가져온 가수, 한대수. 부산 출신인 그는 뉴욕으로 이민 가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1961년 다시 한국 돌아온 그는 록 음악에 심취했고 대학가를 누비며 공연을 펼쳤다. 26세에 해군을 전역하자 마자 코리아 헤럴드의 기자로 활동했고 같은 해 데뷔앨범인 '멀고 먼 길'을 발매했다. 첫 곡이 '물 좀 주소'였다.신중현의 '미인'을 지미 헨드릭스의 'Purple Haze'(1967)과 비교한다면, 한대수의 '물 좀 주소'는 밥 딜런의 'John Wesley Harding' (1967)곡이라 할 수 있다.그의 곡들은 자유와 행복을 염원하고, 때론 한 인간의 비애를 담기도 했다. 한대수는 노래 뿐 만 아니라 어쿠스틱 기타 실력도 선보였다. 그의 첫 앨범은 대 히트였다.큰 인기를 얻었던 첫 번째 곡 '물 좀 주소'는 목이 말라 물 달라고 하는 한 남자의 외침으로 시작된다. ;물 좀 주소. 목마르요. 물 좀 주소~; 갈증을 해소하고픈 '절박함'이 담겨있다.한대수의 끓는 듯한 거친 목소리가 Sonny & Cher 혹은 Mama & The Papas를 연상케 하는 기타 반주에 맞춰 흘러나온다. 이어 베이스 연주가 시작되고 그는 삶의 절박함과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물 좀 주소'를 또 다시 외친다. 드럼연주는 ;비틀즈;의 링고 스타를 떠올린다. 한대수의 울부 짓는 듯한 목소리는 마치 ;비틀즈;의 존 레논과 오노 요코가 '프라이멀 스크림 테라피' (정신요법의 일종)를 받을 때 절규하는 듯하다. 앨범 자켓은 얼굴을 손으로 쥐고 절망에 빠진 듯한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한대수의 모습을 담았다.▲ 1974년 발매된 한대수의 1집 앨범 '멀고 먼 길'. 그의 곡들은 1980년대 후반까지 금지곡이 됐다. (사진제공: 다음뮤직)한대수 역시 당시 정부의 감시를 받았다.당시 민주화, 시민의 자유, 그리고 언론의 자유를 외치는 학생 운동가들은 집회에서 한대수의 노래를 불렀다. 마치 국가를 부르듯 한대수의 노래가 민주화 운동이 열리는 곳마다 울려 퍼졌다. 학생운동가들은 경찰들의 진압에 맞서 흩어지지 않으려고 어깨동무를 하며 한대수의 곡을 열창했다. 그들은 정의와 민주주의를 갈구했다.자유롭게 음악활동을 펼치지 못한 한대수는 뉴욕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그곳에서 밴드를 결성하며 음악활동을 펼쳤다. 필자가 알기로는 한대수는 당시 뉴욕에서 유명했던 록 클럽인 CBGB에서 한국인 최초로 공연을 했다.한대수의 또 다른 곡인 '행복의 나라로'는 '암막'으로 더 이상 가려지지 않은, '어둠' 없는 밝은 세상에 대한 염원을 담았다. 40년이 지난 오늘, 한대수의 공식홈페이지 이름은 '행복의 나라'다.지금의 한국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그리고 문화적으로나 40년 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다. 한국의 문화와 음악은 지난 40년간 엄청난 발전을 이뤘다. 이제 한국은 전 세계 대중문화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한국의 것;으로 재탄생 시켜 다시 전 세계에 수출하고 있다.최근 한 대학연구결과에 따르면 한국이 수입하는 미국의 영화, 음반 등 문화상품이 75%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일본, 대만, 홍콩, 싱가포르, 그리고 중국으로 수출되는 한국 문화상품은 82.3%에 달한다. 서구 문화를 수입해 '동양적인 색'을 입히고 다시 다른 아시아 국가에 수출하는 것이다. 이는 한국이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는 국가이기에 가능한 것이다.서울 명동 지하 상가에는 레코드판을 파는 상점 하나가 있다. 이곳에는 신중현과 한대수의 레코드판은 물론, 그때 그 시절 아날로그 레코드판이 진열되어 있다.흠집 하나 없이 완벽하게 포장된 한대수의 첫 앨범 '멀고 먼 길'은 110,000원에 구입할 수 있다. 40년 전에는 금지곡이었던 신중현과 한대수의 곡들. 이제는 그들의 음악을 마음껏 들을 수 있다. ▲ 1974년, 당시 26세였던 한대수는 첫 데뷔앨범을 발매했다. (사진제공: 다음뮤직)그레고리 이브스 코리아넷 기자gceaves@korea.kr 2014.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