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명불허전(名不虛傳)의 60년 음악인생
거침이 없었다.3살 무렵 이미 정확한 음감을 보였다. 6살에 처음 접한 바이올린에 '운명적 첫사랑'이라고 회고할 정도로 빠져들었다.한국전쟁의 상처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1957년, 9살의 어린 소녀 정경화(鄭京和, Kyung Wha Chung)는 서울시립교향악단과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했다. 미국의 오케스트라가 내한하여 이화여대에서 공연했을 때 잠깐의 휴식시간에 선보인 바이올린연주가 음악 전문 잡지 「뮤직 아메리카(Music America」에 실리면서 신동(神童)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3세 때 미국 줄리어드 음악원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 이반 갈라미언(Ivan Galamian)의 수제자로 공부했다. 같은 제자 핀커스 주커만(Pinchas Zukerman)은 1967년 독일 레벤트리 콩쿠르(Leventritt competition)에도 함께 참가해 경합 끝에 나란히 공동 1위를 차지했다.▲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씨가 서울 자택에서 지난 60년의 음악 인생을 이야기 하고 있다. (사진: 전한 기자)1970년엔 런던에서의 차이콥스키 협주곡 연주로 유럽 데뷔를 하는데, 대성공을 거두면서 순식간에 스타로 떠올랐다. 같은 해 클래식 레이블인 데카에서 차이콥스키/시벨리우스 협주곡으로 첫 음반을 녹음했고, 그 데뷔 음반의 성공으로 데카의 전속 아티스트로 계약한다. 이후 유럽과 북미, 일본의 오케스트라와 유명 지휘자 대부분과 협연을 펼치며, 1년에 100회가 넘는 연주회를 소화하는 연주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1970년 젊은 시절 정경화 씨 모습. (사진제공: 정경화)2005년 9월 시련이 찾아왔다. 왼손 4번째 손가락에 통증이 생기는 불상사가 발생해 그는 직접 무대에 올라 연주 취소를 알려야만 했다. 연이어 두세 번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연주가 불발되자 그는 무대를 내려놓고 2007년 줄리아드 음악원 교수가 되어 후진양성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2011년 8월 언니 첼리스트 정명화와 더불어 대관령국제음악제(GMMFS ,Great (Mountains&International Music festival & School) 음악감독(Artistic Director)을 맡은 그는 다시 무대에 올라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연주했다. 객석은 일제히 환호성을 울리며 기립박수를 보냈다. 결과는 대성공. 자신감을 되찾은 그는 같은해 12월 인천, 대전, 춘천, 서울 등 4대 도시를 순회하며 독주회 ;그녀가 돌아왔다(She Is Back);로 부활을 알렸다. 코리아넷은 다시 기적적으로 연주를 하게 된 그를 만나 60년 음악인생에 대해 대담을 나눴다.▲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씨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사진: 전한 기자)Q1. 어머니를 떼어놓고 정경화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에게 어머니는 어떤 존재인가?어머니는 energy가 대단하셨던 분이다. positive thinking의 소유자였다. 슬럼프에 내려갈수록 더 positive했다. 센스가 섬세하고 육감이 대단했다. 대단한 교육가였다. 너무 많은 사람을 도와주셨다. 어머니는 내게 너무 많은 사랑을 주셨다.Q2. 당신의 담대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어머니를 빼닮았다고 한다. 그건 타고난 것이다. 내 성격은 수줍음이 많으나 옳지않다고 생각하면 화를 분명히 표시하는 sense of justice 의식이 강하다. 어머니는 행동으로 믿음, 노력, 정직, 겸손함을 보여주셨다.어린 시절 우리집에는 가정부가 굉장히 많았고 종업원도 꽤 많았다. 어느날 어머니가 어떤 분과 얘기를 나누다 나를 보고 인사를 드리라고 하셨다. 우리 집에서 일하게 될 분이라고 소개했다. 존경심이 절로 나왔다. 사람은 어떤 위치에 있어도 존중 받아야 되는 소중한 존재라고 각인됐다.그리고 화가 복이 된다. 힘들 때는 나갈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며 항상 공부하셨다.▲9세 때 제2회 ;소년소녀를 위한 협주곡의 밤;에서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 정경화)어머니께선 항상 감사 드리는 마음으로 사셨다. 화가 복이 된다는 낙천주의의 소유자였다. 9살 때인 1957년 11월6일 서울 시공관(市公館, 현재 명동예술극장)에서 김생려 (金生麗) 선생님이 지휘하는 서울시립교향악단과 첫 연주를 가졌다. 제2회 ;소년소녀를 위한 협주곡의 밤;에서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했다. 전혀 떨리지 않고 재미있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선율이 연주될 수 있다는 게 너무나도 기쁘고 행복했다.협연을 하기 전 서울의 클래식 전문다방 ;돌체(Dolce)'에서 레코드를 배경음악 삼아 연습을 했다. 어머니의 아이디어였다. 어머니는 ;세계무대에 섰다고 생각하고 연습을 하라;고 연습을 실전처럼 이미지 메이킹을 해주셨다.이화여중 콩쿠르에서 예선 탈락한 적이 있다. 너무나도 창피해서 부모님을 뵐 낯이 없어 이불을 뒤집어 쓰고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께서 이번에는 연습이 부족해서 안된 것이니 신경 쓰지 말고 다음에 소년소녀 콘서트가 있는데 그때는 얼마나 잘하겠냐고 위로해주셨다. 어머니는 한번도 왜 안됐냐고 물어본 적이 없었다. 넌 할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아 주셨다.Q3. 좌절했을 때 어떻게 극복했나?줄리아드에 갔을 때 너무나도 잘하는 학생들이 많아 기가 죽었다. 큰일 났구나하고 집에 와서 걱정했다. 어머니가 나의 멘델스존 협주곡은 누구에게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격려했다. 남들이 서너 개 하더라도 하나씩 착실히 해나가면 따라잡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하게 됐다. 하나씩 차근 차근해 나가도록 너무 빨리 되더라. 19살이 되니 너무 많아 지더라. 하나씩 소화하면서 살과 뼈를 만들다 보니 어디 가서도 입지를 세울 수 있었다. 너무 괴로워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누구나 김연아가 될 수 없다. 김연아처럼 피겨스케이팅을 즐겨 하면서 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 어머니는 누구처럼 되라한 적 없다. 예술은 도달 못하는 것이다. 무지개를 쫓아가 듯 쭉 퍼져 나가는 것이다.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다. 항상 끊임없이 발견해야 한다. 발견해야 신비스럽게 연주하는 법이다. 그게 연주하는 사람의 recreate다. 없는 데서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Q4. 손가락을 다쳐서 연주생활이 위기에 빠졌을 때 어땠는가?하나님의 뜻으로, 소명(召命, calling)으로 받아들였다. 그 동안 많은 축복을 받은 데 감사 드렸다. 그것을 사회에 되돌려주고 싶었다. 대관령국제음악제를 통한 소통, 특히 청소년, 젊은이들과 가진 대화의 시간들은 소중했다. 부상의 고통으로 잃은 것보다 얻은 게 훨씬 많았다. 인생을 다시 생각했으며 자유롭게 보낼 수 있었다. 생각하기 나름인 것 같다. 마시고 남은 음료수 병을 보고 ;반 병밖에 남지 않았네;라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반 병이나 남았네;라고 긍정적으로 보는 차이가 얼마나 큰가.Q5. 선생님이 생각하는 바이올린의 매력은?우선 고음이란 점이다. 꿰뚫는 소리 말이다. 소프라노, 베이스가 있듯 피셔 디스카우(Dietrich Fischer Dieskau)가 노래하는 것과 체칠리아 바르톨리(Cecilia Bartoli), 마리아 칼라스가 하는 것은 너무 틀리다. 교수로 유명한 다비드 게링가스(David Geringas)가 3개월 전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드보르작 콘체르트 연주를 보고 감동했다. 이번 여름에 그가 방한했다. 과거 내가 함부르크에서 연주했을 때 그가 첼로 수석주자였다. 그가 회고하길 기돈 크레머(Gidon Kremer), 이작 펄만((Itzhak Perlman)이 악보 보고 연주할 때 나는 악보를 외워서 연주했다고 말했다. 기돈 크레머가 그러는데 게링가스가 당시 나의 연주에 깜짝 놀라워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다비드 게링가스는 나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으면서 ;She is Maria Callas"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내 자랑하는 것 아니다. 그 소리 듣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바이올린은 사람의 목소리와 가장 가까운 악기다. 바이올린의 소리는 기가 막힌 소프라노다. 너무너무 passionate해서 좋아했는데. 이제 제 음악 목소리가 많이 약해졌다. 그리고 바이올린 소나타를 연주하는데 중국의 첼리스트 지안 왕(Jian Wang)이 말하길 꼭 비올라를 연주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너무 흐뭇하고 기분이 좋았다. 어렸을 때는 정열적으로 야사 하이페츠(Jascha Heifetz)를 좋아했으나 27살쯤 되니까 낮은 소리로 쏠리더라. 그때부터 과르넬리(Giuseppe Guarneri del Gesu)로 바꿨다. 깊고 얕은 소리를 하게 됐다. 음역이 넓어졌다. 지금도 바이올린이 내는 고음의 매력은 짜릿짜릿하다. 첼로를 들으면 짜릿짜릿하다는 느낌이 오지 않지만 바이올린은 감전되듯 끝내준다. 너무 좋은 악기다.Q6. 장래가 촉망되는 후배들을 꼽는다면?누구보다도 조성진이라고 본다. 다 갖춘 사람이라고 본다. 바이올리니스트로는 이유라를 꼽을 수 있다. 이유라는 비올라도 훌륭하다. 조성진은 완벽하게 성장하고 있으며 이유라 또한 음악성, 기교가 대단히 좋다. 정말 대견하다. 이유라도 얼마나 연구를 하는지 아느냐. 재주도 있지만 대단한 노력가다. 고집도 세다.Q7. 선생과 브람스는 가장 친한 것 같다. 브람스를 왜 그토록 사랑하나?브람스는 클래식 구조에서 떠나지 않고 그 안에 로맨틱(Romantic) 요소가 들어 있다. 음악을 브람스처럼 노력해서 작곡한 사람은 드물다. 브람스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하는데 25년이나 걸렸다. 지속적으로 revise해서 깊다. 오십이 지나서 너무너무 그를 사랑하게 됐다.Q8.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꾸는 젊은 세대에게 한마디 한다면?절대적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 각자 하나님에게서 받은 독특한 재능이 있다고 생각한다. 음악에도 자기 목소리가 있다. 그걸 찾기 위해서 용기, 고집, 정직함, 인내가 필요하다. 솔로이스트로서 찾을 수 있고, 실내악으로도 찾을 수도 있다. 자기의 재능과 독특한 점을 찾아내고 빨리 받아들여야 한다. 자기의 약한 점은 주저하지 않고 보완해야 한다. 나도 평생을 보완하면서 살고 있다. 자기 캐릭터를 살려야 한다. 롤 모델을 굳이 쫓아갈 필요는 없다. 분석, 파악해서 나와 비교해서 활용하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그 사람처럼 될 수 없다. 남을 통해서 자기 목소리를 만들고 찾아야 한다. 자기를 찾아내서 인내와 노력으로 연마해야 한다. 요즘 젊은이에게 너무 압력이 많다. 행복감을 느끼려면 음악을 즐길 시간이 있어야 하는데 옆에서 잘 이해해주는 스승, 부모가 있든가 본인의 고집이 있어야 한다. 자기 목소리를 찾아야 한다.▲1970년 11월 영국 데카/런던 레이블과 독점 레코딩 계약을 체결해 펴낸 데뷔 음반. 앙드레 프레빈이 지휘한 런던 심포니와 협연한 차이코프스키 협주곡과 시벨리우스 협주곡은 데카 데뷔 음반을 통해 정경화를 스타로 만들어주었다. 이 음반은 한국에서 라이선스 LP로 발매돼 국내 라이선스 음반 1호를 기록했다. 또한 영감이 가득한 연주로 ;바이올린을 든 마녀;라는 애칭도 받아냈다.▲최근 일본에서 출반된 1998년 4월 도쿄 독주회 실황 음반. 그가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 마지막 악장 `샤콘느`를 연주할 때 관객들은 숨을 쉴 수 없는 `가위 눌림` 현상을 겪었다고 한다.▲지난 2010년 첫 음반을 내놓은 지 40주년을 기념해 19장의 CD로 이뤄진 ;정경화 데카 데뷔 40주년 기념음반 전집;.위택환, 손지애 코리아넷 기자홍희정 인턴whan23@korea.kr 2013.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