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코리아넷뉴스

전체 11,796

페이지 1130 / 1180

  • 황금 신라의 부장품을 한 자리에서 만나다

    황금 신라의 부장품을 한 자리에서 만나다

    천마총 출토 유물이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였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오는 6월 22일까지 천마총을 주제로 ;천마 다시 날다; 특별전을 개최한다. 천마총금관을 포함한 국보와 보물이 11건, 12점이 포함된 1,600여 점이 출토 이후 처음으로 한 자리에서 전시된다.▲ 천마총 금관 국보188호 (국립경주박물관 제공)천마총은 1,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신라시대(57 B.C. - A.D. 935)를 대표하는 고분 가운데 하나다. ;고분 제155호;로 불리던 이 고분은 지난 1973년 발굴 당시 학계를 넘어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천마도가 그려진 ;천마도장니;가 출토돼 ;천마총;이란 이름을 얻었다. 출토 유물들의 화려함과 다양성으로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고분으로 평가 받고 있다.이번 특별전에서는 백화수피(白樺樹皮ㆍ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기마인물군(騎馬人物紋) 채화판(그림 그려진 판)과 서조문(瑞鳥紋ㆍ상서로운 새 문양) 채화판이 최초 공개된다. 또 백화수피(白樺樹皮ㆍ자작나무 껍질) 말다래 1점과 함께 이번에 새로 천마도로 확인된 '죽제(竹製) 천마문 금동장식 말다래' 1점도 같이 선보인다. 이 채화판 두 점은 발굴 당시 무덤 주인의 머리맡에 있었던 부장품 궤 안에서 출토됐으며 모자 끝에 대서 햇볕을 가리는 챙 또는 말 등에 얹는 장식으로 추정된다.▲ 국립경주박물관이 천마총 특별전에서 처음 공개한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서조문 기마인물상 채화판 세부 모습 (국립경주박물관 제공)발굴 당시 천마총 내부 모습이 재현된 이번 특별전은 '도입부', 1부, 2부, '종결부'의 네 부분으로 구성됐다. 먼저 '도입부'에는 천마총에서 출토 당시 모습 그대로 복제한 복제목관이 전시됐다. 1부에서는 '왕족의 무덤, 천마총'에서는 금관, 금 허리띠 등 부장품들이 목관 주위에 널려있는 장면이 펼쳐진다. 보존처리 과정에서 새로 확인된 용무늬, 봉황무늬 금동그릇, 금을 상감한 연꽃무늬, 넝쿨무늬 등을 새긴 천마총 환두대도(環頭大刀)도 볼 수 있다. 2부 '천마문 말다래와 장식마구'에서는 국립경주박물관이 앞서 공개한 천마문 금동 장식 말다래와 백화수피 천마도 말다래 2점, 죽제(竹製) 천마문 금동장식 말다래' 1점도 만나볼 수 있다. 백화수피 천마도 등 회화류 4점은 보존을 위해 세 차례(3/18~4/6, 4/29~5/18, 6/2~6/22)로 제한 공개된다. '종결부'에서는 발굴보고서와 관련 사진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좌측부터) 국보 189호 금제 관모, 보물 617호 금제관모 꾸미개, 보물 618호 금제관모 꾸미개(국립경주박물관 제공)국립경주박물관 이영훈 관장은 "1973년 광복 이후 최초로 발견된 신라 금관과 천마도로 유명한 경주 천마총의 모든 것을 보여드리는 특별전"이라며 "그 동안 공개하지 못했던 발굴품들을 보존처리를 거쳐 처음 드러낸다;고 말했다.윤소정 코리아넷 기자arete@korea.kr▲ 국립경주박물관이 천마총 특별전에서 처음 공개한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서조문 채화판 전체 모습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국립경주박물관이 천마총 특별전에서 처음 공개한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서조문 채화판 세부 모습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2014.03.21
    상세보기
  • 프란치스코 교황방문과 시복

    프란치스코 교황방문과 시복

    ;야소(耶蘇)라는 말은 번역하면 세상을 구제하는 왕이라는 뜻이니, 두사(陡斯 천주(天主)가 강생(降生)한 뒤의 이름이다. 두사는 아무런 형체가 없을 때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였다. 사람의 시조인 아당(亞當)이 아말(阿襪)의 말을 따라서 두사를 받들지 않음으로 해서, 두사가 세상에 내려와 모든 사람의 죄를 구하고자 하여 의 동정녀(童貞女)인 마리아(瑪利亞)의 몸에서 태어났다. 한(漢) 나라 애제(哀帝) 원수(元壽) 2년 경신 신라 시조 57년. 백제 시조 18년. 고구려 유리왕 19년에 여덕아국(如德亞國) 이마두의 말에 의하면, 옛날의 대진국(大秦國)이라 한다. 야소로 불려진 33년 동안에 사방을 돌아다니며 정도(正道)를 알렸는데, 악당 반작비랄다(般雀比剌多)라는 사람이 무고(誣告)하여 국법에 따라 재판한 결과 극형(極刑)을 받고 죽었다. 죽은 후 3일 만에 부활하여 40일 간을 더 살아 있으면서 세상을 구원하는 일을 마쳤다. 살아난 지 3일 만에 몸을 돌려 하늘로 올라갔다고도 한다. 죽은 것은 사람임을 밝힌 것이고, 다시 살아나 하늘로 올라간 것은 하늘의 뜻임을 밝힌 것이다.;위의 기술은 조선시대 18세기 실학자 이덕무가 천주교에 대해 남긴 글이다. ;야소;는 예수그리스도의 한자어 표기다. ;두사;는 하나님을 의미하는 라틴어 데우스(Deus)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아당;은 성서에서 말하는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며 ;여덕아국;은 이탈리아,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똑같이 마리아로 표기했다. 악당 ;반작 비랄다;는 예수를 처형한 유대총독 폰티우스 필라투스(Pontius Pilatus)를 말한다. 예수가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하고 40일간 더 살았다는 기술 또한 성서와 동일하다. 천주교가 조선에 전래됐던 초기에 작성된 기록으로는 상당히 구체적이고 천주교의 실체를 제대로 전하고 있다.나아가서 이덕무는 천주교에 대해 상세한 설명까지 아끼지 않았다.;의달리아(意達里亞)의 라마성(羅瑪城) 둘레가 1백 50리이다. 야소(耶蘇)가 죽은 뒤에 그의 제자 백다록(伯多祿)이라는 자가 이 성에서 교(敎)를 폈다. 그 뒤를 이어서 교왕(敎王)이 항상 그곳에 사는데, 모든 나라가 다 경의를 표한다. 그 풍속이 전적으로 천주를 신봉하여 서울에서 시골의 거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천주당이 있다. 이곳에는 교무(敎務)를 맡아보는 사람이 있어서 전적으로 교회의 일을 주관하는데, 이를 일컬어 신부(神父)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 (사진: 주한 교황청대사관)오는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한다. 교황은 8월 15일 대전에서 봉헌미사 집전을 비롯해 시복식 집전, 충남 서산 해미성지 등을 방문할 전망이다. 여기서 말하는 시복식은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을 말한다.가장 중요하며 핵심적인 행사로 여겨지는 시복(諡福)은 천주교에서 인정하는 사람을 복자(福者)의 반열에 올려놓는 성스런 의식이다. 복자는 성인(聖人) 이전 단계다. 윤지충과 동료 123위는 조선왕조 시기인 18세기~20세기 유교의 질서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순교했다. ▲ 순교자 윤지충이 천주교 교리를 익혔던 공간은 오늘날 명동성당으로 거듭났다.윤지충은 어떤 인물이기에 시복식의 앞머리에 등장하는 것일까? 윤지충(尹持忠 1759~ 1791)은 조선에서 처음으로 순교한 천주교 신자다. 세례명은 바오로. 명문 가문인 전남 해남(海南) 윤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조선 최고의 시인 윤선도(尹善道)가 6대조이며 걸출한 화가 윤두서(尹斗緖)가 증조부다. 그의 부모는 군왕에게 충성을 지키라는 의미에서 ;지충;이란 이름을 붙였다. 유교의 가치관에 철저했던 그는 24세 관료에 이르는 첫 관문인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중국에서 활동했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리치(Matteo Ricci, 중국명 利瑪竇; 1552~1610)의 저작 ;천주실의(天主實義, The True Meaning of the Lord of Heaven);를 읽으면서 천주교 교리를 배운 후 입교했다. 1791년 모친상을 당한 후 전통적인 유교방식의 제사를 거부했다. 이 때문에 친척과 유림으로부터 불효자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고, 유교의 윤리를 해쳤다는 죄목으로 고발되었다. 신앙을 버리라는 주위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켜 결국 사형에 처해졌다.교황방문에 앞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오는 24일~28일 정기총회를 가진다. 이 자리에서 교황 방한 준비와 함께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 이 주요안건으로 논의될 예정이다.▲ 박근혜 대통령(오른쪽)이 2일 청와대에서 페르난도 필로니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장관을 접견, 악수하고 있다. (사진: 청와대)이번 교황 방한은 한국 정부와 교황청간 지속적인 대화속에서 이뤄졌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 10월2일 청와대에서 교황청 인류복음화성(Congregation for the Evangelization of Peoples) 장관(prefect) 페르난도 필로니 (Fernando Filoni) 추기경(cardinal)을 접견한 자리에서 윤지충 바오로와 그의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에 대해 언급하고 교황의 방문을 요청했다. 박대통령은 이들에 대한 시복 결정이 진행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결정이 빨리 이뤄져 우리 순교자들의 정신이 소중한 유산으로 기려지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한국 천주교인들의 숙원이었던 순교자들의 명예회복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위택환, 백현 코리아넷 기자whan23@korea.kr 2014.03.20
    상세보기
  • 국악소녀 송소희, ‘국악은 내 운명’

    국악소녀 송소희, ‘국악은 내 운명’

    ;국악은 정말 제 운명인 것 같아요.;;국악소녀,; ;국악신동;이라 불리는 송소희, 그는 ;국악은 내가 가야 할 길;이라 당당히 말한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의 권유로 시작한 국악이 이제는 자신의 전부가 되어버렸다는 송소희 양(18).▲ 국악은 내 운명;이라고 말하는 국악소녀 송소희 양. (사진: 전한 기자)1997년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난 그가 국악을 처음 접한 것은 5세 때다. 어린 나이에 ;경기민요;를 훌륭한 기교로 불러내며 국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2004년 전국시조경창대회에서 대상을 수상, 2008년에는 KBS 예능프로그램 ;전국노래자랑;에 출연해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가진 귀여운 외모로 특유의 가창력을 선보이며 대상을 거머쥐었고 그때부터 ;국악 신동;으로 불리기 시작했다.2010년에는 ;한국을 빛낸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도 수상한 바 있다.▲ 국악소녀 송소희 양이 지난 12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국민대통합 홍보대사 위촉식에서 홍보대사로 위촉된 후 축하공연을 하고 있다. (사진: 전한 기자)또한 송소희 양은 유네스코한국위원회 홍보대사와 국민대통합 홍보대사 등 문화예술분야 홍보대사로 위촉되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최근에는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여러 광고와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하며 고운 외모뿐 만 아니라 훌륭한 가창력으로 ;국악계 아이돌;이라 불리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지난 16일에는 러시아 소치에서 열린 ;2014 소치장애인동계올림픽; 폐막식에서 한국을 대표해 ;아리랑;을 부르며 장애인 운동선수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차기 동계올림픽 개최지인 ;평창;을 알렸다.코리아넷은 지난 12일 폐막식을 위해 러시아 소치로 떠나는 송소희 양을 만나 그의 국악사랑에 대해 들어봤다.<국악소녀 송소희와 인터뷰>- 국악이라는 것은 접하고 싶어도 쉽게 접할 수 없는 장르다. 어떻게 처음 국악을 접하게 됐는지 궁금하다.처음에는 내가 원해서 시작한 건 아니었다. 국악인이 되겠다는 꿈도 없었는데 부모님의 권유로 5살 때부터 국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내가 예술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피아노, 미술, 국악 등 많이 접하게 됐다. 그 중 국악을 가장 빨리 배우고 재능을 보여서 국악을 주 전공했다. 그러면서 국악인의 꿈을 키우게 됐다.- ;아, 이 길이 내가 가야 할 길이다;라는 생각이 언제 처음 들었나?어느 순간에 느껴진 것은 아니고 지금까지 해왔기 때문에 몸이 베어버린 것처럼 익숙하게 다가왔다. 우리의 소리, 국악을 하는 것에 대해 자부심이 나날이 커졌다. 하면 할수록 국악에 대한 매력을 느꼈다. 점점 갈수록 더 좋아졌기 때문에 이렇게 계속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송소희 양은 ;한국의 소리, 국악을 하는 것에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한다. (사진: 전한 기자)- 탁 트인 시원한 소리를 유지하기 위해 어떻게 노력하는지?매일 연습 한다. 하루라도 연습을 하지 않으면 소리가 막히는 것 같다. 한번 호되게 당해본 적 있어서 지금은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연습한다. 하루라도 목 관리를 안 하면 그 다음날 바로 나타나기 때문에, 자기 전에 항상 스카프를 두르고 잔다. 그래서 인지 팬들에게 스카프 선물이 많이 들어온다. (웃음)또 배즙을 자주 마신다. 친구들이 배즙에 무슨 보약 탔냐고 묻는데 진짜 그렇다. 보약이 첨가된 배즙을 마시고 있다. 소리를 위해 복식호흡도 한다. 어렸을 때부터 복식호흡을 하나 보니 배가 딱딱해져서 자연스럽게 복근이 생겼다. 윗몸 일으키기를 하면 호흡이 길어진다고 해서 매일 하고 있다.- 지금은 팬클럽 6천명 이상이나 될 정도로 CF는 물론, 각종 TV 프로그램에서 모습을 자주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대중들과 가깝게 소통하는 것에 대해 특별한 이유가 있나?처음 국악을 시작했을 때는 인간문화재가 되고, 또 공연을 통해 국악 매니아층에게만 보여드리는 것 같이 국악의 정식코스를 밝아야겠다고 했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하면 국악이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 음악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에게 많이 들려주고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해서 최대한 국악을 많이 보여드리고, 들려드리려고 TV에 많이 출연하게 됐다. 개인적인 인기를 얻기 위해서라기 보다 은연중에 대중들이 ;국악;이라는 단어를 한번이라도 더 떠올릴 수 있도록 하는 마음에 출연하게 됐다.많은 사람들이 좋아해줘서 너무 감사하다. 인기를 크게 실감하지 못했는데 요즘 국악 공연을 하면 매니아층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많이 보러 와주시고 국악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국악이 재조명 받기 시작했구나;하고 실감한다.- 부모님이 권한다고 해도 국악에 대한 열정, 사랑이 없으면 할 수 없었을 텐데, 국악에 전념할 수 있게 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나의 부모님, 가족들, 그리고 친구들이 너무 많은 힘을 줬다. 오히려 나보다 그들이 국악에 대해 더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내 친구들도 이렇게 좋아하는데 ;국악에 대중적인 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포기할 때는 아니구나;라고 깨닫는다. 또 대중들이 국악에 대해 서서히 마음을 여는 것이 느껴질 때마다 큰 힘이 된다.▲ 국악을 하지 않는 자신의 삶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고 말하는 송소희 양. (사진: 전한 기자)- 16일 2014 소치동계장애인올림픽 폐막식에서 전세계인들이 보는 앞에서 '아리랑'을 열창한다. 전세계인 앞에서 아리랑을 부르는 소감과 그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대한민국을 대표해서 무대에 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우리 음악에 대해 전혀 모르는 세계인들이 ;내 음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하고 설렌다. 긴장도 많이 된다.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간다는 게 대단히 영광스럽다. 더욱 잘해야 된다는 부담감도 있다. 다음 동계올림픽 개최지인 평창을 알리러 간다는 것, 정말 영광스런 기회인 거 같다.- 가장 좋아하는 곡은? 어떤 내용이 맘에 드는지요? 평소에는 주로 어떤 곡을 듣나?국악뿐 만 아니라 최신 인기가요도 즐겨 듣는다. 국악도 많이 듣는데, 첫 번째는 공부하기 위해서 듣고, 두 번째는 진짜 음악이 좋아서 듣는 곡들이 있다. 요즘 해금소리에 너무 빠져서 해금 연주자들의 연주음악을 즐겨 듣고 있다.가장 많이 듣는 것은 해금연주가 꽃별의 비익연리(比翼連里)다. 그의 해금소리에는 많은 감정들이 담겨 있다. 정말 꼭 한번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정말 좋다.- 국악을 하면서 너무 힘들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있었다면?그런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너무 당연한 거라 생각했다. 국악을 안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나 무대에서 노래하는 게 너무 힘들다고 느낀 적은 있었다. 지금보다 덜 알려지기 전에, ;다음 공연은 국악 공연입니다;라는 사회자의 소개에 국악이란 단어만 듣고 관객들이 자리를 뜨고, 벌써 지루해하는 행동이 보였을 때, ;아 진짜 오늘은 하기 싫다;라고 느낀 적이 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10대 어린 나이에 화장을 하고, 한복을 입는 것이 불편하지는 않은지?이젠 익숙해졌다. 어려서부터 입어서 사복보다 한복이 더 편하다. 손 동작이 한복을 입었을 때 더 편하다. 오히려 사복을 입으면 손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겠다. 다리도 한복을 입으면 잘 안보이기 때문에 더 편하다.쇼핑하는 걸 너무 싫어해서 평소에는 어머니가 골라 주시는 옷을 입는다. 하지만 한복만은 내가 직접 색상과 디자인을 골라 입는다. 한복에 욕심이 있어서 아무거나 입고 싶지 않다.소녀답지만 기품 있는 그런 디자인을 원한다. 어렸을 때부터 한 디자이너의 한복만 입어왔다. 그분과 디자인, 색상을 상의해서 한복을 정한다. 원하는 디자인을 직접 그려서 보여주고 색상도 직접 골라서 선생님께 보여드리면 항상 내가 원하는 예쁜 한복으로 만들어 주신다.- 국악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다른 음악을 하면서 느낄 수 없는 뭉클한 감동과 자부심이 국악에 있다. - 자신의 목소리로 꼭 도전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국악이 대중적인 음악이 되려면 시대에 맞게 음악도 조금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국악을 하려면 서양음악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장구, 꾕과리, 가야금뿐 만 아니라 피아노, 기타도 배웠다. 전통 국악에 얽매여서 억지로 국악을 들어보라고 하고 싶지 않다. 국악 본연의 질은 살아있으면서 좀더 세련되고 풍부한, 그러면서 대중적인 국악을 보여드리고 싶다. 작곡에도 관심이 있다. 아직은 학생이라 공부하랴, 국악 소리 연습하랴 정신이 없어서, 작곡까지 하면 나머지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다 놓칠까 봐 못하고 있지만 좀 더 커서 작곡을 꼭 해보고 싶다. ▲ ;국악에는 다른 음악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동과 자부심이 있다;고 말하는 송소희 양. (사진: 전한 기자)-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국악이란? 똑 같은 질문을 여러 번 받아봤는데, 매번 ;어떻게 하면 진부한 답을 주지 않을까;하고 많이 생각했다. 지금보다 어렸을 때는 ;국악은 내 운명이다;라고 아주 형식적인 답을 주곤 했는데, 지금은 진심으로 그런 것 같다. 국악은 정말 내 운명인 것 같다.내가 국악에 소질이 있었더라도 부모님이 일찍 내 재능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전국노래자랑에 도전하지 않았더라면, 아니면 하다가 도중에 내가 포기했었더라면, 여기까지 못 왔을 것이다. 이런 것들을 봤을 때 국악은 정말 내 운명이라고 느낀다. ▲ 송소희 양이 코리아넷 독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와 친필사인.손지애 코리아넷 기자jiae5853@korea.kr 2014.03.19
    상세보기
  • 글로벌 ‘별 그대’ 현상

    글로벌 ‘별 그대’ 현상

    지난 5일 중국 최대 정치행사인 양회(兩會)에서 왕치산(王岐山) 중국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가 베이징 대표단을 만난 자리에서 최근 중국을 점령하고 있는 한편의 한국 드라마를 언급했다.왕서기는 한국 드라마가 중국시장을 점령하고 바다 건너 미국, 유럽까지 영향을 주고 있는 원인에 대해 ;한국 드라마의 핵심과 영혼은 바로 전통문화의 승화시켰기 때문;이라 진단했다.또 중국의 동부의 장쑤성에서는 한 임산부가 며칠 동안 밤새도록 치킨과 맥주를 먹으며 똑 같은 드라마를 보다가 유산을 할 뻔한 일화가 있었다.▲ SBS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주역들. 도민준 역의 김수현(왼쪽)과 천송이 역의 전지현 (사진제공: ;별 그대; 공식홈페이지)그토록 중국인들을 열광케 한 것은 바로 SBS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이하 ;별 그대;);. 중국 대륙을 뒤흔들고 있는 드라마 ;별 그대;는 중국에서 한국드라마 열기를 재 점화시키고 있다.지난해 12월부터 지난 2월 27일까지 방영된 드라마 ;별 그대;는 400년 전 조선시대, 지구에 떨어진 외계인 도민준과 한국의 톱스타 천송이의 달콤 발랄한 로맨스를 그린 드라마다.지구에 떨어진 후 400년 간 늙지도 않고 똑같이 젊음을 유지하는 도민준은 놀라운 시력과 청력, 순간 이동,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측할 수 있는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 세상에서 자신이 최고라고 믿는 천송이와의 만남은 처음부터 삐걱 된다. 서로를 싫어하기도 하고 오해가 생기기도 하지만, 이런 과정 속에서 둘은 서로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확인한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에도 시련이 찾아온다. 400년을 지구에서 살아온 도민준이지만 운명의 짝을 만나고 나니 자기 별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 자신의 별로 돌아간 도민준은 사랑하는 천송이를 찾아 지구로 다시 돌아오고 로맨스를 이어가며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다.특히 마지막 회가 방영된 지난 27일 중국에서는 동시번역이 제공돼 중국 시청자들이 한국 시청자들과 같은 시간에 드라마를 시청했다.중국 내 ;별 그대; 현상에 주목하는 외신의 반응도 뜨겁다.▲ 지난 8일 워싱턴포스트(WP)는 ;중국 관리들, 중국이 한국 같은 드라마를 만들 수 없는 이유 논의;란 제하의 기사로 중국 내에 부는 한국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열풍을 소개했다. (사진캡쳐: 워싱턴포스트)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 8일 ;중국 관리들, 중국이 한국 같은 드라마를 만들 수 없는 이유 논의;란 제하의 기사를 1면에 실었다. 이 기사는 ;;별 그대;는 온라인에서 25억 뷰를 기록했으며 중국 전체에서 시청률 1위를 달성했다;며 중국 내 ;별 그대; 열풍을 소개했다. 이어 ;중국 인민대표 대회의 한 위원은 오전 내내 왜 중국은 이런 히트작을 만들 수 없는지에 대해 통탄했다;며 ;중국의 많은 이들이 한국 드라마의 엄청난 인기가 자국 문화 자부심에 큰 타격을 입힌다고 본다;고 전했다.중국의 광명일보는 11일자 ;한국 드라마의 창의력, 배울 필요 있어;란 제하의 기사에서 ;한국 드라마는 시청자의 감정을 최대한 자극하여 시청자들이 감정 기복을 통해 세속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한다;며 ;이 같은 아름다움은 사람들 사이의 인정(人情)을 진실되게 그려낸 것이며 사람들의 소박한 사랑, 동정 및 관심으로 가득하다;고 평했다.또한 ;일상생활과 업무에 지친 시청자들은 드라마가 그려내는 ;가상 생활공간;에서 감정의 위안을 얻을 수 있다;며 ;눈으로 보는 것은 한국 드라마지만, 마음속으로는 자신의 생활을 돌이키게 되는 것이 한국 드라마가 인기를 얻는 사회;문화적 심리인 것;이라며 한국 드라마를 통해 제작의 지혜를 배우라고 말했다.중국 경화시보는 지난 6일자 기사에서 ;별 그대;가 왜 중국에서 인기를 얻을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해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 번째 이유는 ;소비자에 대한 공략이 매우 정확하고 강하며 여성 시청자들을 대상으로 신비롭고 독특한 느낌을 가져다 준다;는 것. 또 ;한국의 생활방식을 돋보이게 표현해 시청자들에게 신비롭고 독특한 느낌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두 번째 이유로 들었다. 마지막으로 ;구체적이고 전체적으로 색다른 느낌으로 백일몽과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고 평했다. ▲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캡쳐 사진 (사진캡쳐: ;별 그대; 공식홈페이지);별 그대; 열풍으로 중국에서는 주인공들의 패션은 물론, 음식, 문학 등 한국의 전반적인 문화에 대한 관심도 증가하고 있다. 전지현이 연기한 여자주인공 천송이가 `치맥(치킨과 맥주의 줄임말)`을 먹으면서 중국 식당에는 `치맥` 메뉴가 등장했고 ;치맥;을 찾는 사람들로 연일 장사진을 이룬다.또 외딴 섬 해변에서 라면을 끓여먹던 남자주인공 도민준 덕분에 라면을 찾는 중국인들이 늘고 있고, 극중 도민준이 조선시대 김만중이 쓴 고전소설 ;구운몽;을 좋아한다고 말한 이후 중국 번역본이 서점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이와 함께 ;별 그대; 드라마 속 주인공들을 중국 방송에 출연시키기 위한 방송사들의 ;모시기; 경쟁이 펼쳐지고 있다. 최근 장쑤위성TV는 버라이어티 쇼 ;최강대뇌;에 ;별 그대; 속 도민준을 연기한 배우 김수현을 출연시키기 위해 600만 위안(6억)을 투자했다. 지난 8일 난징을 방문한 김수현에게 출연료 400만 위안(4억)과 전세기를 제공했으며, 보안요원 600명을 동원하기도 했다.▲ 지난해 12월 16일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제작발표회에 참석한 배우 전지현(왼쪽)과 김수현 (사진제공: ;별 그대; 공식홈페이지)한 드라마평론가는 ;시청자들에게 쉬운 로맨틱 장르에 스타성 높은 배우들이 출연해 흥행몰이를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데 중국 정치인들과 미국 유력 일간지가 주목했다는 것 자체가 기현상;이라며 ;경제발전을 거듭하는 중국이 고부가가치 산업인 대중문화 성장에도 박차를 가하겠다는 신호;라고 설명했다.손지애 코리아넷 기자jiae5853@korea.kr 2014.03.18
    상세보기
  • 한국형 발전모델 세계와 공유한다

    한국형 발전모델 세계와 공유한다

    지난 11일 아랍에미리트연합(UAE) 국가안보 최고위원회 사무처 사예드 알로타이바(Zayed Alotaiba) 재능개발부 사무총장 등 4명의 대표단이 방한했다. 대표단은 한국교육개발원을 비롯하여 한국교육과정평가원;한국교원대학교;세종특별자치시 참샘초등학교, EBS를 방문, 한국교육의 생생한 현장을 둘러봤다.특히 스마트수업을 실시하고 있는 세종특별자치시 참샘초등학교를 방문해 스마트교과서를 활용한 수업을 참관하고 최첨단 정보통신기술(ICT)이 적용된 학교시설을 시찰하는 등 한국교육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시했다.▲ 말레이시아와 파라과이 중견공무원들이 지난 2012년 10월 방문해 중앙공무원 교육원에서 행정연수를 받고 있다. (사진제공: 한국국제협력단)이번 방한은 아랍에미리트연합 측의 요청으로 이루어졌다. 아랍에미리트의 주요관심사는 교원연수를 위한 상호협력 확대. 지난 2009년부터 자국의 교원을 양성하여 2020년까지 교사의 90%를 자국인으로 교체하는 정책을 추진 중이다.한편 카자흐스탄 환경수자원부의 고위공무원 4명이 ;선진산림행정 연수과정;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다. 이들은 15일;20일 국립산림과학원, 국립수목원, 국립산림품종관리센터를 방문, 전문가와 함께 최신산림기술을 체험하고 상호 협력방안을 모색한다. 카자흐 대표단은 지난 2011년 설립한 아시아산림협력기구(AFoCo) 사무국도 방문, 국제협력 방안도 논의할 예정이다.▲ 카자흐스탄 환경수자원부의 고위공무원들이 지난 15일부터 6일간 진행되는 ;선진산림행정 연수과정;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다. (사진제공: 산림청)조달청은 한국의 전자조달 시스템을 도입한 코스타리카에 공무원을 파견해 시스템 활용을 지원하고 있다. 안전행정부도 안행부는 사우디아라비아와 필리핀의 전자정부 도입을 지원하고 있으며 농림축산식품부와 해양수산부는 인도네시아 농촌과 어촌 마을 개발을 지원하고 있다.위의 사례와 같이 최근 한국정부와 경제개발, 교육, 경제개발, 전자정부 운영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경험공유를 요청하는 움직임이 세계 곳곳에서 늘어나고 있다.아랍에미리트연합은 한국의 특허행정 시스템인 ;특허넷;을 체험한 뒤 ;한국 공무원들이 직접 방문해 똑같은 시스템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 이에 따라 한국특허청의 공무원 5명이 상반기 중 UAE에 가서 관련 시스템을 구축할 예정이다. 이미 아제르바이잔에 전해진 특허넷은 조지아 등 주변 5개국에서 추가 주문이 들어온 상태다.2014년 상반기에만 한국 공무원 26명이 ;행정한류 전문관;이란 이름으로 아시아와 중동, 중남미 등 15개 국가에서 일하게 된다. 안전행정부는 최근 ;행정한류 전문관은 한국의 행정제도나 시스템에 대한 개발도상국의 관심이 커지면서 개도국 정부의 인력 요청이 많아 추진된 것;이라고 밝혔다.위택환;손지애 코리아넷 기자whan23@korea.kr 2014.03.17
    상세보기
  • 1974년, 격변의 시절 환한 빛이 되어 준 2곡의 노래

    1974년, 격변의 시절 환한 빛이 되어 준 2곡의 노래

    2014년은 40주년을 맞이하는 역사적인 일들이 많은 해다. 40년 전인 1974년, 서울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됐으며 박근혜 대통령의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암살당한 해이다. 또한 한국 음악에 큰 획을 그은 음악이 탄생한 해이기도 하다.그 당시 한국에는 락 음악과 포크 음악은 접하기 힘든 생소한 장르였다. 레코드판 한 장 가격이 너무나 비쌌던 그때, 사람들은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복사;판을 구해 듣곤 했다. 원본을 오픈릴식 테이프 녹음기에 틀어 값싼 레코드판에 복사해 파는 사업이 번창했다. 그런 값싼 레코드판은 쉽게 부러졌지만 가격 부담이 적어서 음악 애호가들은 대부분 복사판을 구입해 들었다.전축으로 불렸던 오디오기기는 구하기 힘들었다. 전축은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일 뿐이었다. 하지만 음악은 친구들, 그리고 대학생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다. 그 당시엔 노래방이라는 것도 없었다. 노래방은 1980년대 후반에 와서야 생겨나기 시작했다. 노래방은 없었지만 레코드판 음악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음악 다방;이 있었다. 자정이 넘으면 통행을 금지하는 ;야간통행금지;제도 때문에 밤 11시 30분에는 문을 닫아야 했지만, 그전까지는 비싼 레코드판의 가격 걱정 없이 듣고 싶은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1974년 가장 인기 있는 노래 두 곡을 꼽는다면, 하나는 8월에 발매된 신중현의 ;미인;, 또 하나는 한대수의 ;물 좀 주소;이다. 두 곡은 참신함과 독특하고 재미있는 가사로 큰 인기를 얻었다. 정치적인 메시지는 담고 있지 않았지만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는 학생들은 그 노래의 가사를 바꿔 부르기도 했다.신중현의 ;미인;은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록, 펑크록, 사이키델릭 스타일이 엿보이는 음악이다. 한대수의 ;물 좀 주소;는 ;언플러그드로 연주하는; (전자 악기를 사용하지 않는) 포크 록이다. 이 곡은 한국에 포크 록과 ;언더그라운드 록 밴드;를 처음으로 소개한 음악으로 평가되고 있다.전혀 다른 스타일의 뮤지션이 부른 이 두 곡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현대적이면서도 동시에 매우 전통적인 색을 담고 있다. 발매되자마자 큰 인기를 얻었지만 안타깝게도 이 곡들은 당시 정부에 의해 금지곡으로 분류됐다. 음악 애호가들에겐 1974년 어둠의 시절, 환한 빛줄기와 같은 곡이었다.당시 익숙지 않은 록이라는 음악장르를 대중에서 소개한 신중현의 ;미인;은 록과 펑크 록 두 음악적 색깔과 함께 한국의 전통적인 보컬스타일을 담고 있다. 전설적인 펑크 록 밴드 ;팔리아먼트; 혹은 70년대 펑크 락을 연상시키는 듯한 도입부의 베이스 연주가 인상적이다. ;팔리아먼트;의 베이시스트 부치 콜린스의 연주가 한국 락 음악과 만났다고나 할까. ▲ 신중현의 첫 앨범 ;히키-申: 키타 멜로듸; (사진제공: 다음뮤직)이어 신중현은 ;비틀즈;의 헬터 스켈터(Helter Skelter);을 연상케 하는 창법으로 허스키하고 거친 목소리로 첫 소절을 시작한다. ;한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네 소절이 끝나는 순간 신중현의 화려한 기타연주가 시작된다. 감각적인 기타 연주기법으로 베이스와 환상적인 합주를 선보이며 노래를 이어간다. 반주베이스의 솔로 연주 부분에서는 잠시 노래를 멈췄다가 다시 2절로 들어간다.이 곡이 나왔을 때 신중현의 나이는 36세. 그는 한국전쟁(1950-1953) 이후 음악계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20여장의 앨범을 발매했다.1938년 태생인 그에게 전쟁과 가난의 아픔 속에서 음악은 유일한 해방구였다. 1955년, 17살인 신중현은 엘비스 프레슬리를 흉내 내며 기타를 독학했기 시작했다.음악을 하면서 다른 가수들을 위해 작곡한 곡들에 대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사기를 당하는 등 수많은 수난을 겪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은 멈추지 않았다. 록 밴드를 결성하고 다른 가수들을 위한 작곡활동을 하는 등 활발한 음악활동을 펼친다. 또 1959년, 자신의 첫 데뷔앨범 ;히키-申: 키타 멜로듸;를 발매했다.1962년, 그는 한국 최초의 록 그룹 ;에드 포;를 결성하고 1969년에는 영화 ;푸른사과;의 배경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그의 본격적인 음악활동은 1974년부터였다.1974년 8월, 신중현은 밴드 ;신중현과 엽전들;을 결성해 앨범을 내놓았다. 밴드 이름을 그대로 딴 앨범 ;신중현과 엽전들;에 담긴 곡들은 70년대 펑크 록과 1968년의 혁신적인 록 장르를 한국적 록과 결합시킨 ;사이키델릭 록;을 선보였다.그룹의 리드 기타리스트와 보컬을 맡은 신중현과 함께 ;엽전 멤버;로는 베이시스트 이남이, 드럼연주자 김호식이 맡았다. 미국의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가 결성한 밴드와 구성이 비슷하다. 지미 헨드릭스 밴드도 한 명의 리드 기타리스트와 베이시스트 그리고 드럼연주자로 구성됐다. 한 명의 훌륭한 기타리스트가 있으면 다른 리듬 기타리스트 없이도 혼자서 다양한 연주법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던 것이다.;신중현과 엽전들;의 1집 앨범은 처음 발매 당시 500여장 밖에 나오지 않아 한국에 현존하는 아날로그 레코드판 중 가장 값어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그 앨범의 LP판은 1994년에 발매된바 있다.이 앨범은 찾는 사람이 많아 이후 지구레코드를 통해 재 발매됐다. 2차로 찍어낸 앨범에는 김호신 대신 새 드럼연주자 권용남이 등장했다. 지구레코드사는 좀 더 강렬한 스타일을 원했고 신중현은 기존 곡들을 리메이크해 편집음반을 발매했다.▲ 1974년 8월 25일 발매된 신중현의 20번째 앨범이자 그룹 ;신중현과 엽전들;의 첫 데뷔앨범. 이 앨범의 첫 곡으로 ;미인;이 실렸다. (사진제공: 다음뮤직)첫 곡으로 실린 ;미인;은 발매되자 마자 학생들, 젊은이들 사이에서 대히트였다. 이 곡은 1974년 후반부터 1975년까지 라디오에 계속 흘러나올 정도로 팬들의 오랜 사랑을 받았다.1975년 말, 그에게 뜻밖의 청탁이 들어온다.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찬양하는 노래를 만들어달라는 것. 신중현은 망설임 없이 곧바로 거부했다.그러고 나서 곧바로, 한국 땅의 아름다움과 자연의 아름다움, 그리고 전 세계의 ;평화;를 염원하는 ;아름다운 강산;을 작곡했다.1975년 12월에는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됐고 이후 2년간 정신병원에 감금됐다. 1977년 풀려났을 때 그의 곡들은 여전히 금지곡으로 분류돼 있었고, 발라드와 댄스곡들이 인기를 얻으면서 록 음악은 대중으로부터 외면을 받고 있었다.▲ 1974년 공연을 하고 있는 신중현과 엽전들. (왼쪽부터) 베이시스트 이남이, 드럼연주자 김호식, 그리고 리드 기타리스트 겸 보컬리스트 신중현. (사진제공: Bing Images)신중현과 함께 1974년 한국음악에 큰 변화를 가져온 가수, 한대수. 부산 출신인 그는 뉴욕으로 이민 가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1961년 다시 한국 돌아온 그는 록 음악에 심취했고 대학가를 누비며 공연을 펼쳤다. 26세에 해군을 전역하자 마자 코리아 헤럴드의 기자로 활동했고 같은 해 데뷔앨범인 '멀고 먼 길'을 발매했다. 첫 곡이 '물 좀 주소'였다.신중현의 '미인'을 지미 헨드릭스의 'Purple Haze'(1967)과 비교한다면, 한대수의 '물 좀 주소'는 밥 딜런의 'John Wesley Harding' (1967)곡이라 할 수 있다.그의 곡들은 자유와 행복을 염원하고, 때론 한 인간의 비애를 담기도 했다. 한대수는 노래 뿐 만 아니라 어쿠스틱 기타 실력도 선보였다. 그의 첫 앨범은 대 히트였다.큰 인기를 얻었던 첫 번째 곡 '물 좀 주소'는 목이 말라 물 달라고 하는 한 남자의 외침으로 시작된다. ;물 좀 주소. 목마르요. 물 좀 주소~; 갈증을 해소하고픈 '절박함'이 담겨있다.한대수의 끓는 듯한 거친 목소리가 Sonny & Cher 혹은 Mama & The Papas를 연상케 하는 기타 반주에 맞춰 흘러나온다. 이어 베이스 연주가 시작되고 그는 삶의 절박함과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물 좀 주소'를 또 다시 외친다. 드럼연주는 ;비틀즈;의 링고 스타를 떠올린다. 한대수의 울부 짓는 듯한 목소리는 마치 ;비틀즈;의 존 레논과 오노 요코가 '프라이멀 스크림 테라피' (정신요법의 일종)를 받을 때 절규하는 듯하다. 앨범 자켓은 얼굴을 손으로 쥐고 절망에 빠진 듯한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한대수의 모습을 담았다.▲ 1974년 발매된 한대수의 1집 앨범 '멀고 먼 길'. 그의 곡들은 1980년대 후반까지 금지곡이 됐다. (사진제공: 다음뮤직)한대수 역시 당시 정부의 감시를 받았다.당시 민주화, 시민의 자유, 그리고 언론의 자유를 외치는 학생 운동가들은 집회에서 한대수의 노래를 불렀다. 마치 국가를 부르듯 한대수의 노래가 민주화 운동이 열리는 곳마다 울려 퍼졌다. 학생운동가들은 경찰들의 진압에 맞서 흩어지지 않으려고 어깨동무를 하며 한대수의 곡을 열창했다. 그들은 정의와 민주주의를 갈구했다.자유롭게 음악활동을 펼치지 못한 한대수는 뉴욕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그곳에서 밴드를 결성하며 음악활동을 펼쳤다. 필자가 알기로는 한대수는 당시 뉴욕에서 유명했던 록 클럽인 CBGB에서 한국인 최초로 공연을 했다.한대수의 또 다른 곡인 '행복의 나라로'는 '암막'으로 더 이상 가려지지 않은, '어둠' 없는 밝은 세상에 대한 염원을 담았다. 40년이 지난 오늘, 한대수의 공식홈페이지 이름은 '행복의 나라'다.지금의 한국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그리고 문화적으로나 40년 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다. 한국의 문화와 음악은 지난 40년간 엄청난 발전을 이뤘다. 이제 한국은 전 세계 대중문화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한국의 것;으로 재탄생 시켜 다시 전 세계에 수출하고 있다.최근 한 대학연구결과에 따르면 한국이 수입하는 미국의 영화, 음반 등 문화상품이 75%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일본, 대만, 홍콩, 싱가포르, 그리고 중국으로 수출되는 한국 문화상품은 82.3%에 달한다. 서구 문화를 수입해 '동양적인 색'을 입히고 다시 다른 아시아 국가에 수출하는 것이다. 이는 한국이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는 국가이기에 가능한 것이다.서울 명동 지하 상가에는 레코드판을 파는 상점 하나가 있다. 이곳에는 신중현과 한대수의 레코드판은 물론, 그때 그 시절 아날로그 레코드판이 진열되어 있다.흠집 하나 없이 완벽하게 포장된 한대수의 첫 앨범 '멀고 먼 길'은 110,000원에 구입할 수 있다. 40년 전에는 금지곡이었던 신중현과 한대수의 곡들. 이제는 그들의 음악을 마음껏 들을 수 있다. ▲ 1974년, 당시 26세였던 한대수는 첫 데뷔앨범을 발매했다. (사진제공: 다음뮤직)그레고리 이브스 코리아넷 기자gceaves@korea.kr 2014.03.14
    상세보기
  • 셰익스피어 탄생 450주년 공연 줄이어

    셰익스피어 탄생 450주년 공연 줄이어

    ;아름다운 것은 추하고, 추한 것은 아름답다;이는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의 비극 ;멕베스;에 나오는 대사. 이 작품 속에서는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등 서로 대립되는 가치들이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다. 사회가 거대해지고 혼란스러워 질수록 삶의 본연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고 삶을 짚어보는 깊은 이야기를 하게 된다. 이러한 인간의 복잡한 갈등과 다양한 감성을 셰익스피어만큼 잘 표현해낸 작가가 또 있을까?셰익스피어 탄생 450주년을 맞아 한국에선 그의 작품을 바탕으로 한 연극, 오페라, 영화, 뮤지컬 등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그의 작품은 뛰어난 통찰력으로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선과 악, 욕망의 충돌은 현재진행형이다. ▲ (맨 위부터) 국립극단이 선보이는 ;멕베스;의 한 장면, ;템페스트;의 포스터, ;베니스의 상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노래하는 샤일록; (사진: 국립극단)국립극단은 이달 서울명동예술극장에서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가장 강렬하고 시적인 리듬이 두드러진 작품으로 손꼽히는 ;멕베스;를 올렸고, 4월엔 국립극장 달오름 극장에서 ;노래하는 샤일록;을, 5월엔 같은 무대에서 ;템페스트;를 각각 선보인다. ;노래하는 샤일록;은 원작 ;베니스의 상인;을 크게 변형하지 않으면서도 흑백논리를 벗어나 샤일록을 재해석한 코미디이며 ;템페스트;는 형제 간의 배신과 복수, 우연한 만남과 사랑을 담고 있는 후기 걸작이다. 또 5월 말 명동예술극장에서는 ;줄리어스 시저; 공연도 예정돼있다. ;줄리어스 시저;는 로마의 정치가 시저를 그린 연극으로 ;브루터스 너마저!;라는 유명한 대사로 기억되는 작품이다.오페라도 있다. 국립오페라단은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가 작곡한 오페라 ;오텔로;와 샤를 구노(Charles-Fran;ois Gounod) 작곡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각각 10월과 11월에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잇따라 선보인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우아하고 서정적인 음악과 절묘하게 어우러진 작품이며 ;오텔로;는 원작의 재구성과 방대한 스케일의 음악으로 이루어진 장엄한 비극이다. 셰익스피어 원작을 각색한 뮤지컬도 관객을 찾는다. ;햄릿;의 여주인공 오필리어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뮤지컬 ;오필리어;가 5월 세종문화회관 M시어터에서 공연될 예정이다. ▲ 국립오페라단이 선보이는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위)과 ;오텔로;(아래)의 한 장면 (사진: 국립오페라단)해외초청 공연도 있다. 국립극장은 오는 4월 영국 브리스톨 올드빅 극장 (Bristol Old Vic Theatre)의 연극 ;한여름밤의 꿈;을 초청해 달오름 극장에 올린다. 지난해 영국에서 초연된 이 작품은 런던에서 발행되는 일간지 ;가디언;으로부터 ;마법에 걸린 듯 신비하다;는 호평을 들었다. 올해 2월 런던 바비칸센터(Barbican Centre) 공연을 시작으로 세계 투어에 돌입했으며, 한국에서 마지막 공연이 열릴 예정이다.영화에서는 바즈 루어만(Baz Luhrmann)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Leonard DiCaprio), 클레어 데인즈(Clair Danes) 주연의 1996년 작 ;로미오와 줄리엣;이 27일 한국에 재개봉 된다. 이 작품은 원작의 줄거리와 대사만 살리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각색한 것이 특징이다. 원작에서 나온 앙숙관계의 두 가문은 경쟁기업으로 바뀌고 록음악이 더해지면서 청춘 영화로 변모했다. 프랑코 제페렐리(Franco Zeffirelli) 감독, 올리비아 핫세(Olivia Hussey) 주연, 감미로운 멜로디로 유명한 1968년 작 ;로미오와 줄리엣;이 주는 감수성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재개봉되는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의 포스터 (사진: 프레인 글로벌)이처럼 셰익스피어는 연극, 영화, 뮤지컬, 오페라 등 무대에서 아직도 살아있다. 전 세계에서 단 하루도 그의 작품이 공연되지 않는 날이 없다고 할 만큼 그의 작품은 다양한 변형을 거쳐 무대에 올려지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잇따라 공연되는 또 다른 이유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연극의 교과서라고 일컬어질 만큼 작품에 내재된 갈등을 풀어내는 스토리의 구성과 캐릭터의 묘사가 완벽하기 때문이다.올 초 공연됐던 ;햄릿;을 각색한 연극 ;두 병사 이야기;의 석성예 연출은 ;셰익스피어 작품은 읽을수록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만든다;고 말했고 2월 서강대 메리홀 대극장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을 선보인 양정웅 연출은 ;셰익스피어는 연극인의 영혼과 심장이다;라고 평했다. 국립극단 ;멕베스;의 이병훈 연출은 ;셰익스피어 희곡은 연극의 성서다;며 ;불확실한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은 알 수 없는 시스템에 걸려 들어 파멸한다. 보여지는 세계와 내적인 진실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고 설명했다.국립극단 김윤철 예술감독은 ;타계 400주년을 맞는 2016년까지 셰익스피어 작품은 세계 연극계의 화두가 될 것;이라며 ;앞으로 3년간 셰익스피어의 주요 레퍼토리를 계속해 선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김 감독은 ;셰익스피어 연극은 5세기 전의 작품임에도 어느 나라에서나 동시대 연극으로 현지화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녔다. 현대예술이 구현하고 있는 삶의 신비함과 모호함, 절망에 빠진 부조리적 상황까지도 이미 포함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셰익스피어 연극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매력을 지녔다. 타계 400주년이 되는 2016년에는 보다 본격적인 셰익스피어 판을 벌여볼 것;이라고 덧붙였다.임재언 코리아넷 기자jun2@korea.kr 2014.03.14
    상세보기
  • 곡선으로 지형과 하나된 동대문디자인플라자

    곡선으로 지형과 하나된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이음새 없이 물 흐르는 듯한 디자인. 외부는 모두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건물 내에서 기둥을 찾을 수 없는 비정형 건축물. 이라크 태생의 영국 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가 설계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는 마치 거대한 외계우주선이 서울한복판에 내려앉은 모양이다.21일 개관을 앞두고 서울을 찾은 하디드는 ;건축과 자연의 경계를 허물고 싶었다.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는 건축물과 지형을 하나로 만드는 작업이었다. 굉장히 어려웠지만 성공적으로 구현됐다. 건축물 자체가 지형이 됐다는 것이 DDP의 특징이다;라고 말했다.하디드는 2004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최고의 건축가들에게 주어지는 프리츠커 상(Pritzker Architecture Prize)을 받았다. 그는 DDP외에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베르크이젤 스키 점프대(2002), 독일 라이프치히 BMW센트럴 빌딩(2005), 이탈리아 로마 MAXXI(2010), 2020년 도쿄올림픽 주경기장 등을 설계했다. DDP는 하디드가 한국에서 설계한 첫 프로젝트로 세계 최대의 3차원 비정형 건축물이다. ▲ 어느 각도에서나 다른 모습을 한 DDP의 외부 (사진: 서울디자인재단)그는 건축계에서 오랫동안 ;페이퍼 아키텍트;라 불렸다. 도면 위에 설계는 했지만 실제 건축으로 이어지는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디자인은 파격적이고 과감한데 쉽사리 타협하지 않아 설계도면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의 디자인은 막힘도 경계도 없다는 점이 남다르다. 건물뿐 아니라 가구, 패션, 액세서리까지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하디드는 2007년 국제공모에서 당선되면서 DDP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다. DDP는 서울시가 동대문운동장을 허물고 ;시민과 함께 만들고 누리는 디자인;을 추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다. 설계의 주요 아이디어는 건축물이 주변지형과 결합되는 것이다. 현장에 있는 공원과 유기적 결합할 수 있도록 설계됐고 컨셉트를 충실히 실현해서 이와 같은 결과물이 나오게 됐다.DDP의 특징은 사방 어디에서 보더라도 같은 모양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디자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외부 벽면에 동일한 색의 알루미늄 패널을 덮는 등 표면을 단순화하면서 차분한 느낌을 주도록 설계됐다.▲ DDP의 아트홀 1관, 2관 (사진: 서울디자인문화재단)▲ 지하 2층에서 지상 4층까지 이어지는 조형계단 (사진: 서울디자인문화재단)자하 하디드 아키텍츠(Zaha Hadid Architects)의 파트너인 패트릭 슈마허(Patrik Schumacher)는 ;DDP는 하나의 조형물이만 규칙성이 없고 어느 각도에서 보든지 새로운 이미지, 새로운 모양이 계속해서 펼쳐진다. 낯선 땅을 밟으면서 돌아다닐 때 받는 느낌이다;며 ;중요한 것은 이 건축물이 이음새 없이 연결이 되면서 통일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고 밝혔다.그는 또 ;DDP의 건축개념이 너무나 독창적이고 색다르다;며 ;우리가 지향했던 개념과 건축물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시민의 이해를 얻게 됐다. 처음에는 디자인이 너무 낯설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분위기가 바뀌었다. 대부분의 작품이 이러한 과정을 거쳤다;고 덧붙였다.최첨단 기술로 건축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는 건축비만 약 5000억 원이 투입됐다. 지하 3층, 지상 4층, 연면적 8만5320m2에 컨벤션홀, 아트홀, 전시관, 스튜디오, 비즈니스센터, 편의시설 등 복합공간이 만들어졌다. 기둥도 없고 곡선으로만 이루어진 이 건축물의 설계를 구현하기 위해 최첨단 설계 기법인 BIM(Building information modeling)이 도입됐다. 이는 2차원의 평면적 도면 정보를 3차원 입체설계로 전환하고 설계, 시공, 유지관리 등에 활용하는 기법이다. 또 기둥이 전혀 보이지 않는 실내를 구현하기 위해 초대형 지붕 트러스(Mega-truss)와 스페이스 프레임 등의 새로운 기술이 적용됐다.DDP는 구성 또한 극적이다. 층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공간들이 겹쳐있고 전체를 휘감으며 올라가는 갤러리가 있다. 특히 컨벤션 센터인 아트홀 오픈 스튜디오는 면적 2992m2에 최고 높이 9m로 탁 트인 공간을 자랑한다. DDP는 지하 2층부터 지상 4층까지 휘몰아치는 듯한 조형 계단으로 연결된다.▲ DDP 개관전인 Zaha Hadid_3600이 열리는 갤러리 (사진: 임재언)▲ 곡선이 끝없이 이어지는 건물의 외부 (사진: 임재언)▲ 동대문운동장 부지에서 발견된 유적을 보존한 모습 (사진: 임재언)DDP의 외부는 4만5133장의 서로 다른 모양의 알루미늄 패널로 덮여 있다. 4mm의 알루미늄 패널 제작은 DDP공사의 성패를 가르는 어려운 작업이었다. 하디드는 2차원 곡면 패널을 제작하기 위해 영국과 독일업체에 제작을 요구했으나 비정형 패널 제작은 일일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지고 다 만들려면 20년이 걸린다는 통보를 받았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한국 기술로 최첨단 성형 장비 및 절단기를 개발했다. 이로써 총 6건의 특허를 보유하게 되었고 하디드는 전세계에서 자신이 설계한 디자인을 구현하기 위해 한국의 외장패널을 소개하고 있다.이상규 삼성물산 공무팀장은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건축물이다 보니 참고할 자료가 없어 공사가 쉽지 않았다;며 ;외장패널 공사를 정해진 비용과 공사기간 내에 성공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모든 금속 성형 분야의 기술들을 총 망라했다;고 말했다.- 11일 DDP에서 열린 자하 하디드와의 기자회견에서 그의 건축세계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11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DDP 디자인 컨셉트를 설명하는 건축가 자하 하디드 (사진: 임재언)- DDP를 설계할 때 가장 염두에 둔 것은?- 목표는 서울에서 가장 번화하고 유서 깊은 지역인 동대문에 문화 허브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전시와 이벤트가 주변에 문화적 활력을 줄 수 있도록 설계했다. 성곽의 흔적을 살리면서도 공원과 플라자를 물 흐르듯이 매끄럽게 하나로 묶고 싶었다. 주변에 녹지가 하나도 없다는 점도 고려했다. 최첨단 기술을 사용해 건축물과 자연의 경계를 허물고 이들을 하나의 풍경으로 아우르고 싶었다.- 설계에 곡선을 많이 사용한 이유는?- 커브를 좋아한다. 20년 전부터 여러 프로젝트 시작하면서 건물의 지형과 건축물이 조화를 이루는 것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대형 프로젝트는 넓은 부지에서 건축되기 때문에 지형의 특성을 고러하지 않을 수 없다. 지형을 의식할 수 밖에 없다 보니 둥근 모양이 많이 나오는 것 같다. 낯선 땅을 처음 밟았을 때 주위를 살펴보면 각보다 곡선이 많이 있다. 그래서 곡선이 많이 들어간 것 같다.-DDP는 다른 작품과 어떻게 다른가?- 모든 작품은 공통적으로 장소에 따라(site specific) 많이 달라진다. 지형을 고려하면서 건축물이 나올 수 밖에 없고 이러한 점은 모든 프로젝트에서 고민이다. 이번에는 지형과 건축물의 조화를 이루는 것에 있어서 새로운 접근을 하지 않았나 싶다. 이 부지의 특성, 역사적인 배경, 건축물의 조화를 추구하다 보니 독창적(original)인 결과물이 나왔다.- 세계도시의 많은 도시들 가보았는데 디자인에 관점에서 어떤지?- 여러 곳을 다녀봤지만 유럽과 아시아 도시들은 많이 다르다. 도시마다 자기 고유의 전통에 따라 생겨난 특성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많은 도시들이 글로벌화를 지향하다 보니 공통점도 많이 생긴다. 서울이 글로벌화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하고 있고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여기서 서울이 나아갈 길은 도시성(urbanism)을 어떻게 구현하느냐 하는 것이다.▲ DDP 개관전인 Zaha Hadid_3600 에서 포즈를 취한 자하 하디드 (사진: 임재언)- 어떻게 독창적으로 접근했나?- 건축과 지형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다. 건축물 자체가 지형이 된 것이다. 그런 것이 독창적이다. 지붕이 잔디로 덮여 있는 것을 보더라도 이 건축물이 존재함으로 인해서 새로운 지형을 인공적으로 창조해낸 것이다. 전시공간을 박스형태로 두는 것이 아니라 전시장 자체도 지형에 녹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독창적이다.- 원래의 디자인이 얼마나 구현이 되었는지? DDP의 완성된 모습에 만족하나?- 설계도가 나오고 건축물이 지어지면 또 다른 차원이 생긴다. 실제로 건축자제가 사용이 되면 그런 재질의 특성에 따라서 굉장히 고유한 모습을 갖춘다. 그러면 설계도와 다른 느낌과 분위기를 갖게 된다. 건축을 하는 과정은 설계도를 해석하는 과정이다. 이번 건축은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잘 해석했다는 점에서 성공적이었다.- 어떻게 역사적, 문화적 요소를 고려했나?- (슈마허) 동대문 경기장을 철거하고 디자인플라자를 짓는 것은 서울시의 결정이었다. 공모전에 참가하면서 그런 것이 제시가 됐다. 지형과 조화를 이루는 건축물, 경기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설계에 반영했으면 좋겠다는 주문이 있었다. 경기장에서 사용되었던 투광조명(floodlight)를 보존했다.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경기장 느낌이 나도록 디자인했다.- 전시공간으로서의 건축물의 디자인의 차이는?- (슈마허)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서 곡선의 흐름, 이음새 없이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했다. 도시성(urbanism)이라는 철학을 녹여 내려고 노력했다. 인테리어 디자인 또는 제품 디자인에 다 적용되는 것이다. DDP가 굉장히 복잡한 건물이라서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사용해야만 했다. 곡선을 많이 집어 넣은 것은 의도적이었다. 다목적 공간이 배치가 되어있고 이런 복잡성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시각적 차분함을 담아내야만 했다. 직선이었다며 혼돈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곡선을 이용해서 복잡하지만 차분함과 우아한 느낌을 살릴 수 있었다.- 디자인과 건축은 비슷하다고 본다. 하지만 건축은 훨씬 복잡하고 어려울 수 있다. 건축 공간 속에 공간이 있고 다층적인 공간이 있어서 이를 설계해야 하는 건축이 훨씬 더 복잡하다. 디자인 회사로서는 다양한 규모에서 디자인을 할 수 있다. 기본적인 개념에서 반지 디자인과 건물 디자인은 비슷할 수 있지만 결과물을 만들어내는데 훨씬 더 복잡한 것이 건축이다.- 스케일이 과하다는 지적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무엇을 기준으로 과하다고 하는지 되묻고 싶다. 사실 스케일은 건축가에게 주어진 것이다. DDP는 집이나 사무실을 설계하는 것과는 다르다. 특정 기능을 만족시키기 위해 디자인한 것이다. 지형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곡선을 많이 사용했다. 하지만 직선을 이용해 박스형태로 건축물을 지었다면 지형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보다 훨씬 더 커 보였을 것이다. 정해진 기능이나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축소가 불가능하다. 요건이 달라지면 다른 프로젝트가 됐을 것이다.- 도시 디자인에서 서울이 지향해야 할 점은?- 모든 도시가 도시의 특성을 건축에 고려해야 한다. 교통수단 등의 변천과 함께 많은 도시들이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도시의 성장과 특성도 고려해야 한다. 도시의 모습을 바꾸는데 있어서 새로운 건물을 짓는 것에만 열중할 것이 아니라 도시가 변화하는 특성을 건축에 반영해야 한다.- 여성으로서 정상의 건축가 자리에 올랐다. 건축이 ;끝없는 전투;라고 했는데?- 건축가라는 직업 자체가 굉장히 어렵고 힘들다. 건축가는 동료들, 정치인, 건축주 등을 끊임없이 설득해야 한다. 이 전투가 여성이기 때문에 더 힘든 게 사실이다. 내게 지난 30년은 여성 건축가로서 인정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장애물에 부딪히는 과정이었다. 요즘엔 환경이 많이 바뀌어 여성에 대한 차별이나 편견이 많이 줄었다. 그래도 여전히 여성이 더 힘들다.임재언 코리아넷 기자jun2@korea.kr 2014.03.13
    상세보기
  • 한-캐나다 두 정상, FTA타결 선언

    한-캐나다 두 정상, FTA타결 선언

    박근혜 대통령은 11일 스티븐 하퍼 캐나다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졌다. 두 정상은 한;캐나다 자유무역협정(FTA) 타결 선언하고 한반도에서의 지속가능한 평화와 안정을 위한 북핵 포기 촉구 등에 합의했다.박 대통령과 하퍼 총리는 이날 오후 청와대에서 채택한 '한;캐나나 정상간 공동성명'을 통해 "한;캐나다 FTA 협상 타결을 환영하고 양국간 파트너십을 새로운 단계로 격상시키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게 돼 기쁘게 생각한다"며 "양국이 천부적 파트너로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갈 수 있도록 협력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앞서 박 대통령은 확대회담 모두발언에서 "한;캐나다 FTA가 양국 관계 협력의 새로운 룰이라고 할 수 있고 특히 이것을 바탕으로 두 나라의 경제협력이 더 심화될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라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오른쪽)이 11일 스티븐 하퍼 캐나다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기 전에 악수하고 있다. (사진: 청와대)▲ 박근혜 대통령(오른쪽)이 11일 스티븐 하퍼 캐나다 총리와 정상회담장에서 악수하고 있다. (사진: 청와대)▲ 박근혜 대통령(오른쪽 세번째)이 11일 스티븐 하퍼 캐나다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있다. (사진: 청와대)이에 하퍼 캐나다 총리는 "오늘 우리의 양자 관계는 한국전쟁 당시 캐나다에서 참전했던 2만6천명의 참전용사들, 그리고 한국계 캐나다 20만 교민들과 같은 인적 교류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며 "이를 통해 안보와 경제협력이 더욱 강화될 수 있음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두 정상은 공동성명에서 FTA 협상 타결과 관련해 "작년에 양국 외교관계 수립 50주년을 기념한 데 이어, 양국이 함께 이룩한 획기적인 성과"라면서 "FTA가 가급적 조속히 발효되도록 할 것이라는 의향을 공유하며, 법률 검토와 필요한 국내 절차를 신속하게 완료하고자 한다"고 말했다.그러면서 "한;캐나다 FTA는 21세기형 무역협정으로 양국간 교역;투자 관계를 강화시킴으로써, 양국 국민에게 일자리와 경제적 기회 창출은 물론, 수출기회 증대와 혁신적 파트너십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라며 "한;캐나다 FTA가 이행될 경우, 양국 경제와 중소기업을 포함한 업계, 그리고 소비자들 모두에게 상당한 혜택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한반도 신뢰프로세스 지지두 정상은 공동성명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해 "양국이 지역 및 범세계 문제에 있어 공동의 목표를 수호하고 증진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라며 "박근혜 대통령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가 추구하고 있는 한반도에서의 지속가능한 평화와 안정이 이루어지기를 강력히 희망한다"고 밝혔다.이어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는 북한이 모든 핵무기와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포함한 모든 현존하는 핵;탄도미사일 프로그램을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방법으로 포기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성명은 이어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원칙에 기초한 한반도 평화통일의 비전을 공유하며, 이는 모든 한국인들에게 보다 나은 미래를 가져다줄 것"이라며 "또한 동북아시아에서 신뢰구축의 수단으로서 역내 대화와 협력의 중요성과 역할을 강조한다"고 덧붙였다. 양국 관계에 대해 "두 정상은 한;캐나다 양국이 강력한 경제적 파트너로서, 에너지;자원, 혁신, 과학;기술 및 북극 연구;개발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경제협력 기회가 많다는데 인식을 같이 한다"고 강조했다.위택환․윤소정 코리아넷 기자whan23@korea.kr▲ 박근혜 대통령(가운데)이 공식방한한 스티븐 하퍼 캐나다 총리 환영 공식만찬에서 한-캐나다 FTA와 양국간 협력관계를 강조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 청와대)▲ 박근혜 대통령(오른쪽)이 공식방한한 스티븐 하퍼 캐나다 총리를 환영하는 공식만찬에서 연설하고 있다. (사진: 청와대)▲ 박근혜 대통령(오른쪽 네번째)과 스티븐 하퍼 캐나다 총리가 11일 공식만찬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 청와대) 2014.03.12
    상세보기
  • 터키에서 활약 중인 월드스타, 김연경

    터키에서 활약 중인 월드스타, 김연경

    유럽최대의 터키 배구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국인 선수가 있다. 터키 최상위 배구팀 ;페네르바체(Fenerbah;e);에서 공격과 수비를 넘나들며 종횡무진 활약을 펼치고 있는 배구스타 김연경(25).▲ 터키 여자배구리그에서 맹활약 중인 김연경 선수 (사진제공: 인스포코리아)김연경 선수에게는 ;월드스타;라는 칭호가 더 어울린다. 2011년 입단 후 그가 지금까지 공격수로 활발히 뛰고 있는 ;페네르바체;팀은 터키 여자 프로배구리그 2008-2009, 2009-2010, 그리고 2010-2011시즌까지 3년 연속 우승을 차지한 터키의 최강 팀.영입 당시, 페네르바체 구단의 한 관계자는 "각종 세계대회에서 김연경을 눈여겨보면서 영입을 원했다"며 "공격뿐 아니라 리시브, 블로킹도 뛰어나 '멀티 플레이어'로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김연경 선수의 배구사랑은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됐다. 그는 처음부터 ;배구 신동;이 아니었다. 또래보다 너무 키가 작은 탓에 주로 세터를 보던 ;벤치멤버;였다. 그가 두각을 나타낸 건 한일전산여고에 진학하면서부터다. 고3 무렵 키는 186cm로 훌쩍 커져 있었고 강력한 공격수로 팀의 주전으로 성장했다.2005년 프로무대에 발을 들여놓으며 본격적인 선수 활동을 시작했다. 데뷔 첫해였던 여자프로배구 2005-2006시즌에는 신인왕부터, 정규리그 MVP, 챔피언결정전 MVP까지 싹쓸이 했다. 2006-2007시즌에도 정규리그와 챔피언결정전 MVP를 동시 석권했고 2007-2008시즌 정규리그 MVP 3연패에 이어 2008-2009시즌 챔피언결정전 MVP 3연패를 달성했다.▲ 터키 여자배구팀 ;페네르바체;에서 공격수로 활약하고 있는 김연경 선수가 득점 후 환호하고 있다. (사진제공: 인스포코리아)2009년에는 일본 프로배구 JT마블러스에 입단하며 한국 여자 프로배구 역사상 해외로 진출하는 첫 선수가 됐다. 그는 당시 일본 여자배구 10개 팀 중에서 9위에 머물렀던 JT마블러스팀을 정규리그 우승으로 이끌며 또 한번의 기적을 이뤄냈다.또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는 국가대표팀으로 출전해 한국 여자배구를 세계 4강으로 이끌었고, 메달을 따진 않았지만 한국 여자배구선수 최초로 올림픽대회 MVP를 수상하기도 했다.김연경 선수의 존재감은 터키에서도 그 빛을 발하고 있다. 페네르바체는 지난 2일 유럽배구연맹(CEV) 주최 2013-14시즌 컵대회 준결승전에서 세트 스코어 3-0으로 아제르바이잔의 아제랄바쿠를 완패시켰다. 김연경은 이날 경기에서 서브에이스 2개를 포함해 11점을 기록하며 팀 결승 진출을 견인했고, 3월 말 러시아 팀 우랄로츠카와의 결승전만을 남겨두고 있다.코리아넷은 김연경 선수와의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터키에서의 선수생활과 그의 배구 사랑에 대해 들어봤다.<김연경 선수 인터뷰>- 터키에서 활약하는 모습 잘 보고 있다. 터키에서의 생활은 어떤가?처음에는 쉽지 않았지만 지금은 많이 적응이 돼서 잘 지내고 있다. 해외에서 오랫동안 혼자 생활하다 보니 요리도 많이 늘고 혼자 지내는 게 편해졌다▲ 김연경 선수가 자신을 응원하러 온 터키 팬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제공: 인스포코리아)- 2011년부터 터키 리그에서 뛰게 됐다. 페네르바체와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 듣고 싶다.일본 JT마블러스 팀에서 2년 동안 뛰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그 뒤 유럽 진출을 꿈꾸고 있었다. 때 마침 페네르바체에서 나를 원했고 터키리그 수준이 높다고 생각해 결정하게 되었다. 사실 다른 유럽 팀과 계약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순간 페네르바체에서 연락이 왔고 이 팀을 선택하게 됐다.- 국가대표선수, 2009년 일본 JT마블러스, 그리고 터키 페네르바체 등 지금까지 한국, 일본, 터키 무대에서 뛰었다. 이 세 나라에서 경기하는 차이가 있다면?한국 대표로 뛰는 것은 큰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경기할 때 마음가짐부터 다른 팀 경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리고 한국 대표팀 선수들과 경기를 하면 클럽 팀들과의 경기보다 수준이 높고, 나에 대한 기대도 크다고 생각한다.일본 배구는 정말 빠르고 기본기가 탄탄해 공격을 하면 한 번에 끝내기가 쉽지 않다. 당시 외국인 선수는 나 혼자뿐이라 부담이 컸지만 정말 좋은 경험이었다.터키의 상위 팀과 경기할 때는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블로킹이 높고 그 뒤에 수비가 철저해서 쉽지 않은 것 같다. 처음에는 적응이 안돼서 쉽지 않았지만 지금은 이곳에서 뛰는 것이 매 순간 즐겁다.- 여러 나라의 제의에도 불구하고 터키를 선택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세계에서 배구리그 수준이 가장 높고, 또 훌륭한 선수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어서 이 팀을 선택하게 됐다.- 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배구의 어떤 점에 매료되었나?큰 언니가 배구를 먼저 시작했었는데, 매일 언니가 배구할 때 옆에서 공을 주웠다. 원래 운동을 좋아해서 선수가 되고 싶었는데 마침 배구를 알게 됐고 그게 시작이었다.- 다른 운동을 생각해 본 적은 없나?중학교 때 키가 작은 편이어서 축구를 해볼까 생각했었다. 마침 아는 선배가 배구를 하다가 축구로 종목을 바꾸게 됐고, 그 팀에서 내가 오길 원했다.- 올 시즌 서브 득점 1위, 세트당 득점 2위, 베스트 플레이어 선정 등 모든 시합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192cm의 큰 키에도 민첩한 움직임과 강력한 테크닉을 가질 수 있는 자신만의 몸 관리 비결이 있다면?신체 조건을 잘 가지고 태어난 것도 있고, 항상 노력하고 연구하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학창시절에 키가 작은 편이라 공격보다는 수비 연습을 많이 했었던 것이 지금큰 도움이 되고 있다. 몸 관리를 위해 각종 영양 보충제를 꾸준히 복용하고, 잠도 많이 잔다.- ;다른 선수들보다 이것만은 자신 있다;하는 자신만의 무기가 있다면?큰 키에도 불구하고 수비에 강점을 가지고 있는 것.- 25살. 당신은 아직 젊다. 언제까지 선수활동을 하고 싶나? 그리고 은퇴 후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궁금하다.오랫동안 선수활동을 하고 싶다. 아직 확실하게 ;언제까지; 정해놓진 않았지만 다치지 않고 좋은 기량을 유지한다면 하고 싶을 때까지 계속 하고 싶다. 은퇴 후에는 지도자나 배구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 만약 배구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 것 같나?배구가 아닌 다른 운동을 하고 있지 않을까.- 운동하느라 해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도 많을 것 같다. 지금 이 나이에 가장 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없다. 지금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 말도 통하지 않은 외국에서 생활하면서 어려움도 많이 있었을 것 같다.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극복하는지 궁금하다.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혼자 있으면서 밀려오는 외로움도 힘들 때가 있었다. 말이 잘 통하지 않더라도 이곳 선수들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면서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했다. 지금은 처음보다 영어나 터키어가 조금 늘어서 대화하는데 전혀 불편하지 않다.- 지금까지 포기 하지 않고 운동을 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은 무엇인가?그냥 쉬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항상 꿈을 생각하며 그 꿈에 가깝게 가려고 노력했다. 옆에서 항상 함께 해주는 가족이 있기에 힘을 내서 계속 나아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당신에게 배구란?삶, 내 인생이다. 인생과 마찬가지로 배구에도 행복할 때와 슬플 때가 있다. 내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배구를 하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게 됐다. 배구도, 인생도 앞으로 계속 나와 함께 같이 가야 하는 것이다.▲ 김연경 선수가 코리아넷 독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와 친필 싸인 (사진제공: 인스포코리아)손지애 코리아넷 기자jiae5853@korea.kr 2014.03.11
    상세보기
열람하신 정보에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