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시일
- 2018.05.31
독일의 상호문화성 정책, 세계문화의 집(HKW) 소개
□ 주요 내용
1. 배경
2. 2000년대 이후의 독일 문화 정책 – 상호문화성
3. HKW(세계문화의집)
*주요 내용 목차를 클릭하면 해당 부분으로 이동합니다.
1. 배경
2. 2000년대 이후의 독일 문화 정책 – 상호문화성
3. HKW(세계문화의집)
*주요 내용 목차를 클릭하면 해당 부분으로 이동합니다.
[배경]
독일의 문화정책은 기본적으로 문화 연방주의에 기초하고 있어 각 지역의 정책 방향이 일괄적인 것은 아니나, 시대마다의 일정한 지향점은 존재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문화정책 기조는 지속적으로 변화되어 왔다. 구서독의 경우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68혁명 시기까지를 통틀어 “문화보호의 시대”로 부르는데, 이 시대의 정책 방향은 “고급문화 후원”에 있었다. 당시 서독은 전쟁과 유대인 학살을 연상시키는 히틀러의 망령을 지우고 새로운 독일의 이미지를 만들고자 하던 중, 1949년 탄생 200주년을 맞는 괴테를 이에 적합한 컨텐츠로 선택했다. 영국이 세익스피어를 통해 자국의 문화 이미지를 만드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전략이었다. 독일의 여러 극장들은 인류애적 휴머니즘 정신을 강조한 괴테의 “이피게니아”로 다시 문을 열었다. 극장에서는 괴테를 비롯한 독일 고전주의자들의 작품이 공연되었고, 콘서트홀에서는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음악이 울려 퍼졌으며, 미술관에서는 칸딘스키, 클레, 몬드리안의 전시가 주를 이뤘다. 또 전쟁 중에 파괴된 극장, 박물관, 미술관, 콘서트홀, 도서관, 문서보관소의 재건을 위한 후원금이 쏟아졌다.
하지만 동시대 문화를 전혀 반영하지 않으며, 정통 부르주아 문화만을 대상으로 한 이 문화 정책에 대한 지적이 생겨 나기 시작했다. 68혁명 이후 1969년 사회민주당으로의 정권 교체가 이뤄지면서, 수상 빌리 브란트는 정부 성명에서 연속성과 개혁, 더 많은 민주주의, 변화에의 능력이라는 세가지 “내적 변혁” 강령을 선언했다(Glaser 339). 브란트가 제기한 ‘더 많은 민주주의’를 문화 정책으로 실현하고자, 1971년 외무성의 문화국장 게오르크 슈텔처는 기존의 고급문화 중심의 문화정책이 가진 한계성과 왜곡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기존의 문화개념은 문명과 문화를 구분한 지엽적 개념임을 반성함과 동시에 “모두를 위한 문화”(Kultur für alle)라는 확장된 문화 정책의 방향이 제시되었다. 이로서 고급 문화로부터 소외되었던 사람들에 대한 지원이 시작되었다. 시민대학, 음악학교, 미술학교 들이 새로이 건립되었고, 사회 문화 센터에 대한 지원이 확대 되었으며, 대중들은 예술교육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공급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 독일 통일로 인해 문화 재원 확보가 어려워지는 상황이 닥쳤고, 신자유주의의 등장과 함께 문화경영학이 도입되면서 상업적인 문화사업도 일부 정책의 고려 대상에 포함되기 시작했다. 공적으로 지원되는 문화 공급의 과잉은 문화 재원이 약화되면서 곧 문제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또 시민들이 “어떤 문화를 원하는 가”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어떤 문화 공급이 시민들에게 올바른가”에 초점을 맞췄던 “공급자” 중심의 태도에 대해서도 문제가 제기 되었다. 문화 보호, 문화 작업의 시대를 거쳐 1990년 이 시기를 “문화 경영의 시대”라 칭한다. 문화연방주의에 기반한 기존의 문화정책은 근본적으로 일정 정도 시장의 원리로부터 자유로웠기에, 독일은 다른 나라에 비해 문화와 경제의 관계에 대한 논의와 이론적 정리가 늦게 시작되었다. 1996년 브레멘 주정보는 공공극장에 대한 지원은 대폭 삭감한 반면에 뮤지컬 극장을 건립하는데 상당한 후원금을 지불했다. 다른 주의 전통적인 국립극장과 공연장 역시 그 예외가 아니었다. 운영 인원을 줄이는 데에도 한계에 도달한 기관들은 입장권 이외의 수입원을 찾는데 주력해야 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다, 지역 예술 축제로 그 탈출구를 찾았다. 축제는 연중 관광객들이 그 지역을 가장 많이 찾는 여름 휴가철에 주로 개최되는데, 지역 연극 극장의 경우 이를 통해 예산의 23퍼센트 정도를 자체 해결하게 되었다. 하지만 문화적 개념이 비정형적인 트렌드에 따라 그 유동성을 가지게 된다는 점과, 장기 정책의 방향이 불투명하다는 면에서 문제 제기가 이뤄졌다.
<2000년대 이후의 독일 문화 정책 – 상호문화성>
2005년 새로 등장한 정부는 문화 후원이 “독일의 가치 있는 삶을 위한 투자” (메르켈 수상)이며, “문화를 통상재화로 평가절하 할 수 없음“ (문화부 장관 베르튼 노이만)을 강조했다. 독일의 문화정책가 쉐이트(Oliver Scheytt)는 독일 사회가 서비스사회, 정보사회, 문화사회로 변화하고 있는 점에 주목했다. 여기서 문화사회란 노동사회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여가가 더 이상 단순한 휴식이나 삶의 보완물이 아닌, 필수적인 생활시간이자 살아가는 이유가 되는 삶을 뜻한다. 쉐이트는 문화사회란 ‘문화적인 것’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사회의 연결고리가 되는 것을 말하며, 또한 문화사회에서는 문화정책에 대한 국가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Schett, 15-16). 동시에 ‘문화정책’의 저자 푹스(Max Fuchs)는 인구통계학적 변화를 근거로 주도문화의 주창자들을 비판하며, 상호문화성 정책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문화는 성장을 강요하는 산업사회의 생활 방식에 비판적 사고를 가지고, 나아가 이를 성찰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했다. 즉 문화적 다양성이 사회와 개인의 발전 뿐만 아닐, 경제적으로 이익이 되며, 민주주의 발전에도 기여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독일의 문화정책에서 문화적 다양성이 수용된 것은 사실 서구 다른 국가에 비해 오래되지 않았다.
2002년, 2003년 무렵 이민법 논쟁과 함게 인구통계학적 변화를 근거로 문화정책의 방향 역시 상호문화에 두어야 한다는 논의가 공공연하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2007년 3월 18일 유네스코의 문화적 다양성 협약이 체결된 후, 이에 대한 보다 본격적인 논의와 연구가 시작되었다. 문화적 다양성이야말로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추진력, 평화와 안전을 위한 불가결한 전제, 인간의 권리와도 밀접히 관련된 것으로 간주된다는 내용의 이 협약 체결을 위해 독일은 적극적으로 나섰고, 이를 국내 정책에서도 수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방 문화정책회의에서 상호문화가 주제로 채택되었다. 다문화주의 관점에서 문화 통합을 위한 문화 정책의 적극적인 방향 전환 요구되었고, 문화적 다양성이 사회적 자원이며 기회라는 점이 강조되었다.
상호문화성 정책이 구현될 수밖에 없는 보다 현실적인 요구는 인구 통계학적 변화에서 비롯되었다.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연합 전체적으로 출생률은 1.3명에 그치고 있고, 인구 100명 중 60세 이상 고령 인구가 현재 44명에서 2020년에는 55명으로, 2030년에느 71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노년층의 문화적 요구가 정책에 반영되어야 하는 현실이다. 또 다른 큰 변화 중의 하나는 당연 인종 변화이다. 현재 독일의 이주자 비율은 전체 인구의 15%에 이르고 있다. 젊은 세대로 갈수록 그 비율이 높아 지는데, 대도시의 경우 이미 주민의 3분의 1이상이 비독일인 출신이며, 6세 이하의 아이들에게는 비독일인이 이미 다수가 된 상태이다. 인구 12만명에 지나지 않는 슈바벤 하일보른의 경우 주민의 46퍼센트가 이주자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 중 10세에서 14세 연령에서는 63퍼센트에 이를 정도로 그 비율이 높다. 갈수록 다원적인 생활양식과 가치들로 사회가 구성되어 가고 있기에, 이주자들 특히 젊은 세대들은 독일의 교양시스템에서 소홀히 하고 독일적 주도문화만을 주장할 경우에 이는 곧 사회적 불안요소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은 상호문화성 정책을 강화시켰다.
< HKW(세계문화의집) >
독일 상호문화성 정책의 구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세계문화의 집 프로그램을 소개하고자 한다. 베를린 세계 문화의 집 (das Haus der kulturen der Welt in Berlin)에서 정의하는 문화는 자국 문화를 넘어, 세계의 서로 다른 문화들, 한 사회 내의 서로 다른 문화들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굴 껍질 모양 아치형 지붕 때문에 Oysters라는 별명을 가진 HKW는 베를린의 허파라고 할 수 있는 티어가든 공원 한 가운데 있는 광장에 자리 잡고 있다. 이 광장은 17세기 때만 하더라도 사냥터 및 유원지로 쓰이던 곳이었다. 1950년 이 광장에 의회 건물이 세워졌고, 이 건물은 1956년부터 1980년대까지 국제 회의, 행사, 전시 등 다양한 국제 행사의 장으로 쓰이면서 베를린 시의 상징적인 건축물로 자리잡았다. 1980년 건물 지붕이 내려 앉는 사고가 발생하는데, 이를 계기로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시작되었다. 공사가 끝난 1987년, 베를린시 설립 750주년을 기념하는 축제와 문을 다시 열었고,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국제교류를 위한 문화 행사만을 지속적으로 주최할 장소에 대한 필요성이 늘어남에 따라, 연방 정부는 1989년 이 건물을 HKW(세계문화의집) 이라 명명했고, 국제 교류를 목적으로 하는 전시 및 낭독, 워크샵, 무용, 연극, 영화, 축제의 장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독일 내 대부분의 문화 기관이 지방자치정부의 예산으로 운영되는 반면, HKW의 주예산은 연방 정부 문화 예산이며, 프로그램은 연방 정부 문화정책의 방향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HKW의 다양한 프로그램 중 주목할 만한 프로젝트 지금으로부터의 100년(100 Years of now)을 소개하고자 한다. 다양한 학자와 작가, 국가간 협력해 출판, 강연, 전시, 콘서트, 영화 상영, 축제 등을 통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무수한 문화적, 역사적 개념과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과정을 가지는게 이 프로젝트의 내용이다. 열린 자세로 우리가 함께 서 있는 현재를 받아들이고 앞으로를 함께 모색해보고자 하는 이 야심찬 프로젝트는 2015년에 시작되었고 약 4년간 이어질 예정이다.
프로젝트 서문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한다.
어떤 과거의 경험들이 우리에게 오늘날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나?
어떻게 단일민족국가 시스템이 지금과 같은 세계 정세로 바뀌어 왔는가?
근대화 이념은 여전히 유효하는가?
이 시대를 살아 가기 위한 필요한 새로운 기준이 갖춰야 할 조건은 무엇인가?
음악은 얼마 만큼 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으며, 여전히 저항의 도구로써 쓰일 수 있는가?
미래의 학교는 어떤 모습일까?
영역별로 살펴 보면, 낭독 프로그램 중 1927년에 쓰여진 “난민. 제네바 호수 에피소드”(1927)라는 옛 텍스트를 함께 읽는 낭독 프로그램이 있는데. 저자 스테판 즈웨이그는 1차 세계 대전 중 러시아 군대가 독일의 아주 작은 마을인 제네바 호수에 도착했을 때, 한 개인의 끔찍한 운명이 얼마나 조직화되고 피상화 된 권력에 의해 스러져 가는지를 담담히 보여준다. 이를 통해 난민의 역사가 남의 역사가 아닌 우리 모두가 한번은 가졌던 그리고 언제든 가질 수 있는 공유의 역사임을 환기 시켰다. 낭독 프로그램의 목표는 “서로의 눈높이에서의 대화” (a dialogue at eye level)를 통해 동정이나 연민이 아닌 이해와 공감을 이끌어 내고자 하는데 있다.
다양한 나라의 뮤지션들이 함께 참여하는 실험적인 음악제 “Free! Music program”은 상업 음악과 별개로 음악이란 도구를 통해 이 시대 우리는 얼마나 그리고 어디까지 자유롭게 표출 할 수 있는가를 다양한 아티스트들과 관객이 할게 실험해 나가면서 답을 찾는 프로젝트이다. 또 덴마크 출신인류학자인 Tore Tvarnø Lind는 고의로 조성된 난폭한 음의 진행과 연주, 혹은 강요된 반복 청취가 어느 정도까지 사람에게 고문 기구로 사용될 수 있는지, 실재 사례를 탐구 했고, 이 결과를 관객들과 함께 나눴다. 신체에 살짝 피가 날만큼의 작은 상처를 낸 후 신경이 잔뜩 예민해진 상태에서 3일간 수면을 금지시키고 Aerosmith의 곡 Meat Loaf를 들려준 뒤, 하반신이 마비되어 버린 한 이디오피아 테러리스트의 사례, 실제로 미국이 고의로 강렬한 음악이 담긴 CD를 군대와 일반인들을 통해 배포시켜 이라크, 쿠바, 아프가니스탄의 감옥에서 쓰이게 한, CIA의 작전명 “dark sites”등의 흥미로운 사례를 공유했다.
또 역사를 재서술하기(Re-Narrating History)란 프로젝트를 통해 현대사 혹은 미술사에서 중요한 사건과 개념이 현재에 갖는 의미를 아티스트와 학자가 함께 토론하고, 이를 웹사이트 공유하고 출판으로 결과물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예를 들면 “레디메이드” 개념 미술의 시작을 알린 마셀 뒤샹의 변기 작품을 지금의 시각으로 다시 보고, 그 뒤 시대에 따라 이 “레디메이드”란 개념은 어떻게 바뀌어 왔으며, 지금에 있어서 개념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대표적인 전시로는 러시아의 근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개념인 “Cosmos”와 관련된 자료를 함께, 모더니즘이 러시아에서는 어떤 식으로 소화되었는지를 살펴보는 전시 “Art Without Death: Russian Cosmism”와 강연 시리즈가 꼽을 수 있다. HKW의 수석 큐레이터 안젤름 프랑케(Anselm Franke)와 김현진 큐레이터가 공동 큐레이팅한 이 전시는 여러 면에서 화제를 모았다. 전시 제목은 영화/극 제작자인 Ho Tzu Nyen의 작품 “2 or 3 tigers”에서 따왔다. 전시는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 오며 아시아 각 나라의 고유 문화 혹은 미신 속 호랑이가 상징하는 바가 어떤 식으로 시대에 따라 변했는 가를 살펴 봤다. 싱가폴이란 말은 사자를 뜻하는 “Singa”와 도시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pore”가 합쳐진 말이다. 사실 싱가폴을 상징하는 동물인 사자인데, 역사상 싱가폴에 사자가 존재한 적이 없다. 싱가폴 국가의 창시자인 Sang Nila Utama가 멀리서 본 호랑이 였으리라 추측한다. 당시 싱가폴에 많은 수의 호랑이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에 이르러 영국 식민지 당시 기존의 숲을 밀어 버리고, 대규모 농장이 지어짐에 따라, 거주지에 까지 호랑이가 출몰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1년에 많게는 300명이 넘는 사망자가 속출하자, 영국은 호랑이 사냥에 나섰다. 그 결과 20세기 초 싱가폴에서는 완전히 호랑이가 사라지게 되었다. 착각을 기반으로 한 건국 신화는 존재 하지 않는 호랑이로 인해, 다시금 판타지가 되어 버렸다. 호랑이의 멸종 이후, 호랑이란 뜻은 시대에 따라 두려움의 상징, 숲 속에 숨어 있는 용감한 용사 혹은 신비로운 적 등 여러 갈래의 상징으로 사람들의 상상 속에 존재하기 시작한다. 이 전시의 흥미로운 점은, 동물의 시각으로 바라 본 아시아 현대사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인간의 시각과 컨텍스트는 서 있는 그 자리와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기 힘들다. 반수반인의 상태로 바라본 아시아 현대사의 모습은 우리가 믿고 있는, 배워 온 현대사의 다른 면 혹은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부분에 대해 질문을 하게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박찬경, 임흥순, 임민욱 작가의 작품이 초대되었다.
독일의 문화정책은 기본적으로 문화 연방주의에 기초하고 있어 각 지역의 정책 방향이 일괄적인 것은 아니나, 시대마다의 일정한 지향점은 존재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문화정책 기조는 지속적으로 변화되어 왔다. 구서독의 경우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68혁명 시기까지를 통틀어 “문화보호의 시대”로 부르는데, 이 시대의 정책 방향은 “고급문화 후원”에 있었다. 당시 서독은 전쟁과 유대인 학살을 연상시키는 히틀러의 망령을 지우고 새로운 독일의 이미지를 만들고자 하던 중, 1949년 탄생 200주년을 맞는 괴테를 이에 적합한 컨텐츠로 선택했다. 영국이 세익스피어를 통해 자국의 문화 이미지를 만드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전략이었다. 독일의 여러 극장들은 인류애적 휴머니즘 정신을 강조한 괴테의 “이피게니아”로 다시 문을 열었다. 극장에서는 괴테를 비롯한 독일 고전주의자들의 작품이 공연되었고, 콘서트홀에서는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음악이 울려 퍼졌으며, 미술관에서는 칸딘스키, 클레, 몬드리안의 전시가 주를 이뤘다. 또 전쟁 중에 파괴된 극장, 박물관, 미술관, 콘서트홀, 도서관, 문서보관소의 재건을 위한 후원금이 쏟아졌다.
하지만 동시대 문화를 전혀 반영하지 않으며, 정통 부르주아 문화만을 대상으로 한 이 문화 정책에 대한 지적이 생겨 나기 시작했다. 68혁명 이후 1969년 사회민주당으로의 정권 교체가 이뤄지면서, 수상 빌리 브란트는 정부 성명에서 연속성과 개혁, 더 많은 민주주의, 변화에의 능력이라는 세가지 “내적 변혁” 강령을 선언했다(Glaser 339). 브란트가 제기한 ‘더 많은 민주주의’를 문화 정책으로 실현하고자, 1971년 외무성의 문화국장 게오르크 슈텔처는 기존의 고급문화 중심의 문화정책이 가진 한계성과 왜곡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기존의 문화개념은 문명과 문화를 구분한 지엽적 개념임을 반성함과 동시에 “모두를 위한 문화”(Kultur für alle)라는 확장된 문화 정책의 방향이 제시되었다. 이로서 고급 문화로부터 소외되었던 사람들에 대한 지원이 시작되었다. 시민대학, 음악학교, 미술학교 들이 새로이 건립되었고, 사회 문화 센터에 대한 지원이 확대 되었으며, 대중들은 예술교육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공급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 독일 통일로 인해 문화 재원 확보가 어려워지는 상황이 닥쳤고, 신자유주의의 등장과 함께 문화경영학이 도입되면서 상업적인 문화사업도 일부 정책의 고려 대상에 포함되기 시작했다. 공적으로 지원되는 문화 공급의 과잉은 문화 재원이 약화되면서 곧 문제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또 시민들이 “어떤 문화를 원하는 가”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어떤 문화 공급이 시민들에게 올바른가”에 초점을 맞췄던 “공급자” 중심의 태도에 대해서도 문제가 제기 되었다. 문화 보호, 문화 작업의 시대를 거쳐 1990년 이 시기를 “문화 경영의 시대”라 칭한다. 문화연방주의에 기반한 기존의 문화정책은 근본적으로 일정 정도 시장의 원리로부터 자유로웠기에, 독일은 다른 나라에 비해 문화와 경제의 관계에 대한 논의와 이론적 정리가 늦게 시작되었다. 1996년 브레멘 주정보는 공공극장에 대한 지원은 대폭 삭감한 반면에 뮤지컬 극장을 건립하는데 상당한 후원금을 지불했다. 다른 주의 전통적인 국립극장과 공연장 역시 그 예외가 아니었다. 운영 인원을 줄이는 데에도 한계에 도달한 기관들은 입장권 이외의 수입원을 찾는데 주력해야 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다, 지역 예술 축제로 그 탈출구를 찾았다. 축제는 연중 관광객들이 그 지역을 가장 많이 찾는 여름 휴가철에 주로 개최되는데, 지역 연극 극장의 경우 이를 통해 예산의 23퍼센트 정도를 자체 해결하게 되었다. 하지만 문화적 개념이 비정형적인 트렌드에 따라 그 유동성을 가지게 된다는 점과, 장기 정책의 방향이 불투명하다는 면에서 문제 제기가 이뤄졌다.
<2000년대 이후의 독일 문화 정책 – 상호문화성>
2005년 새로 등장한 정부는 문화 후원이 “독일의 가치 있는 삶을 위한 투자” (메르켈 수상)이며, “문화를 통상재화로 평가절하 할 수 없음“ (문화부 장관 베르튼 노이만)을 강조했다. 독일의 문화정책가 쉐이트(Oliver Scheytt)는 독일 사회가 서비스사회, 정보사회, 문화사회로 변화하고 있는 점에 주목했다. 여기서 문화사회란 노동사회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여가가 더 이상 단순한 휴식이나 삶의 보완물이 아닌, 필수적인 생활시간이자 살아가는 이유가 되는 삶을 뜻한다. 쉐이트는 문화사회란 ‘문화적인 것’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사회의 연결고리가 되는 것을 말하며, 또한 문화사회에서는 문화정책에 대한 국가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Schett, 15-16). 동시에 ‘문화정책’의 저자 푹스(Max Fuchs)는 인구통계학적 변화를 근거로 주도문화의 주창자들을 비판하며, 상호문화성 정책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문화는 성장을 강요하는 산업사회의 생활 방식에 비판적 사고를 가지고, 나아가 이를 성찰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했다. 즉 문화적 다양성이 사회와 개인의 발전 뿐만 아닐, 경제적으로 이익이 되며, 민주주의 발전에도 기여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독일의 문화정책에서 문화적 다양성이 수용된 것은 사실 서구 다른 국가에 비해 오래되지 않았다.
2002년, 2003년 무렵 이민법 논쟁과 함게 인구통계학적 변화를 근거로 문화정책의 방향 역시 상호문화에 두어야 한다는 논의가 공공연하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2007년 3월 18일 유네스코의 문화적 다양성 협약이 체결된 후, 이에 대한 보다 본격적인 논의와 연구가 시작되었다. 문화적 다양성이야말로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추진력, 평화와 안전을 위한 불가결한 전제, 인간의 권리와도 밀접히 관련된 것으로 간주된다는 내용의 이 협약 체결을 위해 독일은 적극적으로 나섰고, 이를 국내 정책에서도 수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방 문화정책회의에서 상호문화가 주제로 채택되었다. 다문화주의 관점에서 문화 통합을 위한 문화 정책의 적극적인 방향 전환 요구되었고, 문화적 다양성이 사회적 자원이며 기회라는 점이 강조되었다.
상호문화성 정책이 구현될 수밖에 없는 보다 현실적인 요구는 인구 통계학적 변화에서 비롯되었다.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연합 전체적으로 출생률은 1.3명에 그치고 있고, 인구 100명 중 60세 이상 고령 인구가 현재 44명에서 2020년에는 55명으로, 2030년에느 71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노년층의 문화적 요구가 정책에 반영되어야 하는 현실이다. 또 다른 큰 변화 중의 하나는 당연 인종 변화이다. 현재 독일의 이주자 비율은 전체 인구의 15%에 이르고 있다. 젊은 세대로 갈수록 그 비율이 높아 지는데, 대도시의 경우 이미 주민의 3분의 1이상이 비독일인 출신이며, 6세 이하의 아이들에게는 비독일인이 이미 다수가 된 상태이다. 인구 12만명에 지나지 않는 슈바벤 하일보른의 경우 주민의 46퍼센트가 이주자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 중 10세에서 14세 연령에서는 63퍼센트에 이를 정도로 그 비율이 높다. 갈수록 다원적인 생활양식과 가치들로 사회가 구성되어 가고 있기에, 이주자들 특히 젊은 세대들은 독일의 교양시스템에서 소홀히 하고 독일적 주도문화만을 주장할 경우에 이는 곧 사회적 불안요소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은 상호문화성 정책을 강화시켰다.
< HKW(세계문화의집) >
독일 상호문화성 정책의 구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세계문화의 집 프로그램을 소개하고자 한다. 베를린 세계 문화의 집 (das Haus der kulturen der Welt in Berlin)에서 정의하는 문화는 자국 문화를 넘어, 세계의 서로 다른 문화들, 한 사회 내의 서로 다른 문화들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굴 껍질 모양 아치형 지붕 때문에 Oysters라는 별명을 가진 HKW는 베를린의 허파라고 할 수 있는 티어가든 공원 한 가운데 있는 광장에 자리 잡고 있다. 이 광장은 17세기 때만 하더라도 사냥터 및 유원지로 쓰이던 곳이었다. 1950년 이 광장에 의회 건물이 세워졌고, 이 건물은 1956년부터 1980년대까지 국제 회의, 행사, 전시 등 다양한 국제 행사의 장으로 쓰이면서 베를린 시의 상징적인 건축물로 자리잡았다. 1980년 건물 지붕이 내려 앉는 사고가 발생하는데, 이를 계기로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시작되었다. 공사가 끝난 1987년, 베를린시 설립 750주년을 기념하는 축제와 문을 다시 열었고,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국제교류를 위한 문화 행사만을 지속적으로 주최할 장소에 대한 필요성이 늘어남에 따라, 연방 정부는 1989년 이 건물을 HKW(세계문화의집) 이라 명명했고, 국제 교류를 목적으로 하는 전시 및 낭독, 워크샵, 무용, 연극, 영화, 축제의 장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독일 내 대부분의 문화 기관이 지방자치정부의 예산으로 운영되는 반면, HKW의 주예산은 연방 정부 문화 예산이며, 프로그램은 연방 정부 문화정책의 방향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HKW의 다양한 프로그램 중 주목할 만한 프로젝트 지금으로부터의 100년(100 Years of now)을 소개하고자 한다. 다양한 학자와 작가, 국가간 협력해 출판, 강연, 전시, 콘서트, 영화 상영, 축제 등을 통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무수한 문화적, 역사적 개념과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과정을 가지는게 이 프로젝트의 내용이다. 열린 자세로 우리가 함께 서 있는 현재를 받아들이고 앞으로를 함께 모색해보고자 하는 이 야심찬 프로젝트는 2015년에 시작되었고 약 4년간 이어질 예정이다.
프로젝트 서문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한다.
어떤 과거의 경험들이 우리에게 오늘날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나?
어떻게 단일민족국가 시스템이 지금과 같은 세계 정세로 바뀌어 왔는가?
근대화 이념은 여전히 유효하는가?
이 시대를 살아 가기 위한 필요한 새로운 기준이 갖춰야 할 조건은 무엇인가?
음악은 얼마 만큼 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으며, 여전히 저항의 도구로써 쓰일 수 있는가?
미래의 학교는 어떤 모습일까?
영역별로 살펴 보면, 낭독 프로그램 중 1927년에 쓰여진 “난민. 제네바 호수 에피소드”(1927)라는 옛 텍스트를 함께 읽는 낭독 프로그램이 있는데. 저자 스테판 즈웨이그는 1차 세계 대전 중 러시아 군대가 독일의 아주 작은 마을인 제네바 호수에 도착했을 때, 한 개인의 끔찍한 운명이 얼마나 조직화되고 피상화 된 권력에 의해 스러져 가는지를 담담히 보여준다. 이를 통해 난민의 역사가 남의 역사가 아닌 우리 모두가 한번은 가졌던 그리고 언제든 가질 수 있는 공유의 역사임을 환기 시켰다. 낭독 프로그램의 목표는 “서로의 눈높이에서의 대화” (a dialogue at eye level)를 통해 동정이나 연민이 아닌 이해와 공감을 이끌어 내고자 하는데 있다.
다양한 나라의 뮤지션들이 함께 참여하는 실험적인 음악제 “Free! Music program”은 상업 음악과 별개로 음악이란 도구를 통해 이 시대 우리는 얼마나 그리고 어디까지 자유롭게 표출 할 수 있는가를 다양한 아티스트들과 관객이 할게 실험해 나가면서 답을 찾는 프로젝트이다. 또 덴마크 출신인류학자인 Tore Tvarnø Lind는 고의로 조성된 난폭한 음의 진행과 연주, 혹은 강요된 반복 청취가 어느 정도까지 사람에게 고문 기구로 사용될 수 있는지, 실재 사례를 탐구 했고, 이 결과를 관객들과 함께 나눴다. 신체에 살짝 피가 날만큼의 작은 상처를 낸 후 신경이 잔뜩 예민해진 상태에서 3일간 수면을 금지시키고 Aerosmith의 곡 Meat Loaf를 들려준 뒤, 하반신이 마비되어 버린 한 이디오피아 테러리스트의 사례, 실제로 미국이 고의로 강렬한 음악이 담긴 CD를 군대와 일반인들을 통해 배포시켜 이라크, 쿠바, 아프가니스탄의 감옥에서 쓰이게 한, CIA의 작전명 “dark sites”등의 흥미로운 사례를 공유했다.
또 역사를 재서술하기(Re-Narrating History)란 프로젝트를 통해 현대사 혹은 미술사에서 중요한 사건과 개념이 현재에 갖는 의미를 아티스트와 학자가 함께 토론하고, 이를 웹사이트 공유하고 출판으로 결과물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예를 들면 “레디메이드” 개념 미술의 시작을 알린 마셀 뒤샹의 변기 작품을 지금의 시각으로 다시 보고, 그 뒤 시대에 따라 이 “레디메이드”란 개념은 어떻게 바뀌어 왔으며, 지금에 있어서 개념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대표적인 전시로는 러시아의 근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개념인 “Cosmos”와 관련된 자료를 함께, 모더니즘이 러시아에서는 어떤 식으로 소화되었는지를 살펴보는 전시 “Art Without Death: Russian Cosmism”와 강연 시리즈가 꼽을 수 있다. HKW의 수석 큐레이터 안젤름 프랑케(Anselm Franke)와 김현진 큐레이터가 공동 큐레이팅한 이 전시는 여러 면에서 화제를 모았다. 전시 제목은 영화/극 제작자인 Ho Tzu Nyen의 작품 “2 or 3 tigers”에서 따왔다. 전시는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 오며 아시아 각 나라의 고유 문화 혹은 미신 속 호랑이가 상징하는 바가 어떤 식으로 시대에 따라 변했는 가를 살펴 봤다. 싱가폴이란 말은 사자를 뜻하는 “Singa”와 도시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pore”가 합쳐진 말이다. 사실 싱가폴을 상징하는 동물인 사자인데, 역사상 싱가폴에 사자가 존재한 적이 없다. 싱가폴 국가의 창시자인 Sang Nila Utama가 멀리서 본 호랑이 였으리라 추측한다. 당시 싱가폴에 많은 수의 호랑이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에 이르러 영국 식민지 당시 기존의 숲을 밀어 버리고, 대규모 농장이 지어짐에 따라, 거주지에 까지 호랑이가 출몰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1년에 많게는 300명이 넘는 사망자가 속출하자, 영국은 호랑이 사냥에 나섰다. 그 결과 20세기 초 싱가폴에서는 완전히 호랑이가 사라지게 되었다. 착각을 기반으로 한 건국 신화는 존재 하지 않는 호랑이로 인해, 다시금 판타지가 되어 버렸다. 호랑이의 멸종 이후, 호랑이란 뜻은 시대에 따라 두려움의 상징, 숲 속에 숨어 있는 용감한 용사 혹은 신비로운 적 등 여러 갈래의 상징으로 사람들의 상상 속에 존재하기 시작한다. 이 전시의 흥미로운 점은, 동물의 시각으로 바라 본 아시아 현대사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인간의 시각과 컨텍스트는 서 있는 그 자리와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기 힘들다. 반수반인의 상태로 바라본 아시아 현대사의 모습은 우리가 믿고 있는, 배워 온 현대사의 다른 면 혹은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부분에 대해 질문을 하게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박찬경, 임흥순, 임민욱 작가의 작품이 초대되었다.
Ⅱ. 문화예술 디렉토리 | ||||
기관 및 단체 |
기관/단체명 |
세계 문화의 집(Haus der Kulturen der Welt) | ||
유형 |
공공기관 |
장르 |
미술 | |
운영주체 |
독일 연방 총리실 산하 | |||
소재지 |
베를린 |
설립년도 |
1988 | |
기관현황 |
| |||
홈페이지 |
||||
○ 1988년 설립된 ‘세계 문화의 집’은 미술, 무용, 연극, 음악, 문학, 영화 와 미디어 등의 분야에서 비유럽 국가들의 예술을 소개하고 유럽과 비유럽국가 간의 문화 교류 증진을 주 과제로 하고 있음. 따라서 세계 문화의 집에서 추진하는 프로그램은 아프리카, 아시아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역사적,문화적 발전상황 및 현대예술과 세계화에 따른 예술․문화의 변동을 보여주는 데 중점을 두고 있음. 전시․공연 등의 행사는 전문가, 큐레이터 그리고 예술가들의 국제적인 협력을 통해 기획되고 진행됨.
○ 세계 문화의 집은 예술 프로그램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서 전 세계의 유명한 예술가와 학자들로 구성된 전문자문위원회를 두고 있으며, 세계 각지의 문화기관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예술프로그램들을 개발하고 있음.
○ 조직 및 인원 : 이사진, 프로젝트1과(문학, 사회, 학문), 프로젝트2과(미술, 영화, 미디어), 프로젝트3과(음악, 무용, 연극), 국제협력과, 행사조직과, 총무과, 언론 및 홍보담당과, 기술과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관장을 포함하여 약 48명이 근무
| ||||
* TIP :
|
작성: 주독일 한국문화원(2018. 5.)
위 저작물은
"공공누리 4유형(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