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다원주의, 톨레도에서 배우다
마드리드에서 남쪽으로 80km, 차로 약 1시간 정도 거리에 톨레도(Toledo)라는 옛 고도가 있다. 타호강을 옆에 끼고 언덕 위에 세워진 이 아름다운 도시는 한마디로 말해 도시 전체가 살아있는 하나의 박물관이다.이곳에는 아랍인들이 세웠던 성, 그들이 살았던 아랍풍의 아름다운 집들, 기독교 대성당, 교회들, 유태인 회당, 유태인들이 몰려서 살았던 거주지, 각종 역사적 건축물, 골목길, 그림, 조각 등등이 곳곳에 즐비하다.일찍이 게르만족의 일파인 서고트족 왕국이 이곳에 자리를 잡았었고, 그 뒤를 이어 이슬람왕국이 300년 넘게 이곳을 중심으로 문화의 꽃을 피웠다. 서기 1085년 기독교 왕국이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면서 지금의 도시가 이곳에 형성됐다. 톨레도는 바로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는 고트족, 아랍, 기독교, 그리고 유대 문화가 하나로 어우러진 다문화 도시다. 이런 다양한 문화유산으로 톨레도는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최고의 관광지이자, 우리로 하여금 문화의 다원성이 어떤 것인지를 몸소 체험토록 해주는 생생한 장소다. 우리들은 이슬람 세력이 물경 8세기간 스페인 전역을 지배했던 역사적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당시 이슬람 세력은 스페인 북부 일부를 제외한 모든 전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아랍은 스페인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그가 기독교인이거나 유대인이거나 상관없이)에게 개방정책을 썼고 배척이 아닌 포용을 통해서 그들을 지배했었다.제7회 런던한국영화제 트레일러 영상지금이야 이슬람인과 기독교인, 이슬람인과 유태인들은 앙숙이지만 당시의 스페인은 이 세 문화가 사이좋게 공존하는 곳이었다. 아랍 세계는 기독교에 관용적인 정책을 펼쳤고, 심지어 유태인들까지도 포용하여 그들을 박멸하기는커녕, 그들이 자신들과 비슷한 책 또는 글자를 숭상하는 민족이라고 간주하여 존중했다. 당시의 이슬람 사원에서 오전에 아랍인이 예배를 보고, 오후에 기독교인들이 예배를 보는 것은 그리 낯선 광경은 아니었다. 유태인들 역시 그들의 회당(시너고그)에서 자신들의 예배를 볼 수 있었다. 아랍 남자들은 기독교 백인여성들의 좋은 신랑감이었고 유태인 학자들은 이 세상에서 대해서 아랍 철학자들과 토론하고 함께 고민했다. 관용이나 개방은 아랍세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기독교 왕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훗날 1492년, 기독교 왕국이 이슬람세력을 완전히 밀어내고 스페인에 피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순혈주의와 정통 기독교 사상이 지배적인 이념으로 등장하고, 그것으로 아랍인과 유대인이 박해받고 추방당하기 전까지 스페인 기독교 왕국에서도 문화의 다원주의 정신은 존재했다. 스페인에는 우리나라의 세종대왕에 비견할만한 알폰소 10세(1221년~1284년)라는 현왕이 있었다. 그는 코란이나 유대교 최고의 경전 탈무드, 유태 신비주의 사상인 카발라, 멀리 인도 동화까지 유태인, 아랍인 철학자, 사상가들을 동원하여 번역시켰고, 유태인 지식인들의 도움을 받아 법, 사상, 역사가 망라된 종합 대전을 쓰기도 했다. 우리가 서구인들의 놀이로 알고 있는 체스(실은 아랍인들의 놀이지만)에 관한 책이 서구 최초로 나온 것도 바로 이 때다.당시 스페인 남부의 코르도바는 사라센 제국의 바그다드와 더불어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였다. 지금이야 이슬람 문명이 많이 왜곡되어 있고 무시되고 있지만 당시 스페인의 이슬람은 대수학을 발명했으며, 아라비아 숫자는 로마숫자를 대체했었다. 종이가 유럽에 소개된 것도 이 무렵이다. 동시에 이슬람 문명은 그리스 철학이나 로마법을 배우고 수용했으며 멀리 비잔틴, 페르시아의 예술을 흡수했을 뿐만 아니라 유대교나 기독교의 신학, 교리들을 공부하고 토론하고 논의했다. 코르도바를 통해서 아랍문화는 북유럽으로 전해졌고, 또 아랍의 스페인을 통해서 유럽세계는 그리스 고전이나 철학을 새로이 접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랍어를 알았을 리 만무한 유럽세계가 어떻게 해서 아랍의 문화를 접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서구문명의 한 축인 그리스 고전들은 어떻게 해서 유럽에 전해졌을까? 톨레도는 이미 아랍의 지배를 받았을 때도 학문의 중심지로로 유명했었다. 그러다가 1085년, 기독교 세력이 아랍세력을 쫓아내고 기독교 왕국을 세우면서 기존의 아랍, 유대문화의 기반위에 기독교 문화까지 합쳐지면서 이곳은 말 그대로 유럽 최대의 문화, 학문의 중심지가 된다. 그러면서 아랍세계가 이룩한 학문세계에 더하여 유럽에서 잊혀졌던 그리스 고전의 재발견이라는 분위기 속에서 톨레도 번역자 학교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인문주의의 황금기인 르네상스를 일구게한 힘은그리스 고전들이 스페인에서 가장 먼저 번역된 것은 아니다. 이미 바드다드에서는 수많은 그리스 고전들이 아랍어로 번역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프랑스의 툴루즈, 마르세이유, 그리고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팜플로나, 세고비아 등에서도 라틴어 번역이 성행했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그 중심지는 톨레도 번역자 학교였다.당시 유럽의 많은 지식인들은 최고의 학문을 자랑하던 톨레도에 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이교도가 지배하는 이슬람 왕국에는 갈 수 없다가, 톨레도가 기독교 왕국에 의해 재정복되자 12세기 플랑드르,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등 유럽의 많은 학자들이 대거 이곳으로 몰려들었고, 그들은 유럽에서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수많은 아랍 책들, 고전들을 그곳에서 발견했다. 그들은 바로 이 번역자 학교에서 모여서 아랍어로 이미 번역된 그리스 고전들을 라틴어로 열심히 번역했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 철학 및 아랍의 과학, 의학, 천문학, 문학 철학 등이 톨레도를 통해 유럽에 전해졌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같은 철학서, 로마 최고의 의학서라는 갈레누스의 저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나오기 전까지 서구 천문학의 바탕을 이루었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천체학(Almagest), 유클리드의 기하학, 아르키메데스의 원주율 계산법 등 수학서, 그리고 코란, 아라비안나이트, 신드밧의 모험 등 문학작품들도 라틴어로 번역되어 서구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물론 당시 톨레도 번역자 학교에는 아랍 저작물뿐만 아니라 히브리어로 된 저서도 많았고, 그것들 역시 라틴어로 번역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유감스럽지만 지금 톨레도 번역자 학교의 건물은 사라지고 없다. 그러나 이 학교가 구현하던 지적탐구와 문화교류의 정신은 하나의 상징으로 여전히 살아 있다.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기독교 중심의 일방적인 정보 전달로 인해 분쟁, 폭력, 테러가 떠오를 수 밖에 없는 이슬람 문명이 오늘날의 세계가 만들어지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이슬람 문명의 개방성 및 공존의 정신과 문화적 창조의 힘이 바탕이 되어 그리스·로마 고전 문화를 보존·계승하였으며 이것을 통해 중세의 암흑시대를 벗어나 인문주의의 황금기인 르네상스를 일구게 되었다는 것이다.아울러, 이와 같은 이슬람 문명을 바탕으로 한 스페인은 역사적으로 많은 이민족과의 혼합, 융합을 통해 다민족, 다문화를 이룩했고 작금의 세계적인 문화추세인 퓨전(Fusion), 또는 문화의 융합주의를 어느 나라보다도 앞서 실천하고 경험한 나라다. 이런 점에서 스페인이 현재 기독교, 이슬람 문화권의 상호 이해 증진과 협력을 위한 "문명간 연대"라는 모임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쉽게 이해가는 일이다. 폐쇄가 아닌 개방, 배척이 아닌 포용의 정신 지향해야교통수단 및 인터넷 등 정보수단의 발달로 세계는 어느 때보다 가까워졌고, 사람의 이동은 그 어느 때보다 수월하게 되었다. 한국도 이전의 폐쇄된 사회를 벗어나 여러 다양한 인종,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 들어와 일하고 삶을 꾸리고 터전을 잡는 다민족사회, 다문화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은 아직도 폐쇄된 사회에 머물러 있어 실제 우리나라에 정착한 외국인들에게 차별, 폭력 등의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고 있으며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다양한 문화와의 소통과 융합을 통한 창조적 발전을 제한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는 두말할 것도 없이 폐쇄가 아닌 개방, 그리고 배척이 아닌 포용의 정신이다. 만약 우리가 스페인에서 배워야 할 점이 있다면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리나라 속에 있는 타 문화나 이주민에 대한 개방과 관용의 관점이 아닐까? 주스페인 한국문화원 | 2010.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