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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으로 일제에 맞선 베델
2019.06.07



글·사진 = 전한 기자 hanjeon@korea.kr
일러스트 = 마누스 유진

“나는 죽을지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민족을 구하라”
1909년 5월 1일, 37살의 나이로 한국에서 숨을 거둔 영국인 어니스트 토마스 베델(Ernest Thomas Bethell, 1872~1909)이 남긴 유언이다.

베델은 1904년 발발한 ‘러일전쟁’ 취재를 위해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Daily Chronicle)’ 특파원으로 한국에 첫 발을 디뎠다.
일본의 한국 침략에 대한 야욕이 본격화 되는 것을 지켜보던 베델은 특파원을 그만두고 1904년 7월 18일 서울 전동(지금의 종로구 수송동)에서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다.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양기탁 선생이 대한매일신보 총무를 맡았고 애국지사들은 적극적인 지원을 했다.
한국어와 영어로 발행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는 황성신문의 주필이자 훗날 제2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한 박은식(1859~1925) 선생이 이름을 올렸고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인 신채호(1880~1936) 선생, 1909년 구국의 명문으로 꼽히는 논설 ‘한국동포에게 고함’이란 논설을 남긴 최익 등이 필진으로 활약했다.

▲ 서울 중구에 위치한 한국프레스센터 1층 중앙에는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어니스트 토마스 베델 사장((Ernest Thomas Bethell, 오른쪽)과 양기탁 총무의 흉상이 자리잡고 있다.

▲ 서울 중구에 위치한 한국프레스센터 1층 중앙에는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어니스트 토마스 베델 사장((Ernest Thomas Bethell, 오른쪽)과 양기탁 총무의 흉상이 자리잡고 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서울에 통감부가 설치됐다. 당시 일본의 거물 정치인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가 통감으로 부임하며 일본이 사실상 통치를 시작했고 일본 헌병대는 모든 신문을 발행 이전에 검열했다.

이런 상황에서 베델은 국한문의 ‘대한매일신보’, 영어신문인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발행하는 것에 이어 1907년 5월 한글 전용 신문을 창간해 3개의 신문을 발행했다.

영국인 베델이 발행한 신문인 치외법권의 특혜로 사전 검열을 피할 수 있었다. 그의 신문은 당시 상황을 정확히 전달하는 것과 동시에 항일운동의 본거지 역할을 했다.

을사늑약이 체결에 대항해 황성신문의 장자연이 한국 언론사에서 최고의 논설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이 날에 목 놓아 통곡하노라)’을 20일자에 실었다. 그리고 일제는 황성신문을 정간시켰다.

이를 지켜본 베델은 장자연의 용기를 극찬하는 것과 동시에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폭로하는 기사를 연이어 게재했다. 또한 장자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영문으로 번역해 ‘코리아 데일리 뉴스’에 실었다.

일본에서 영국인이 발행했던 ‘재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은 ‘코리아 데일리 뉴스’에 개재된 영문 ‘시일야방성대곡’ 전문을 게재했고 일본의 한국 침략 사실은 일본에 거주하는 서양 사람들과 서방 나라에 전파됐다.

베델의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한국민들의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1907년 9월경에 이르러서는 세 가지 신문의 발행부수가 1만 부를 넘어설 정도였다. 이는 당시 발행된 다른 신문 전체 발행 부스를 상회하는 수치다.

항일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게 된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에게 있어 눈엣가시였다. 일본은 갖은 이유를 내세워 영국정부에 베델을 한국에서 추방할 것을 요구했고 베델은 1907년 주한 영국 총영사관에서 재판을 받았다.
기소 이유는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가 보도한 10건의 기사가 ‘소요를 일으키거나 조장시켜 공안을 해친다’는 것이었다. 베델은 6개월 근신이라는 유죄판결을 받았다.

▲ 언론으로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던 어니스트 토마스 베델(Ernest Thomas Bethell) 초상화가 지난 5월 1일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서 열린 ‘베델 선생 경모대회’ 식장에 서있다.

▲ 언론으로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던 어니스트 토마스 베델(Ernest Thomas Bethell) 초상화가 지난 5월 1일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서 열린 ‘베델 선생 경모대회’ 식장에 서있다.


일제는 베델을 추방하라는 요구를 멈추지 않았고 1908년 두 번째 재판이 열렸다.
한국, 일본, 영국이 관여된 두 번째 재판은 3일간 열렸고 베델은 3주일 간의 금고형과 함께 6개월 간 근신, 350파운드의 보증금을 납부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중국 상하이에서 3주간의 복역을 마치고 7월 11일 출옥한 베델은 이어진 일본의 탄압과 매도를 당했다. 일본 언론은 베델이 국책보상금을 횡령했다는 사실 무근 보도를 냈다.

베델은 신문을 통해 공개적으로 명예회복에 나선 것과 동시에 법적인 절차를 진행했다.

베델은 1908년 12월 9일과 10일, 이틀 동안 상하이에서 열린 영국고등법원의 재판에서 승소하고 보상금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1909년 5월 1일 갑자기 사망했다.

의학적 사인은 심장확장이었지만 지속적인 일제의 탄압으로 초래된 옥살이와 누명에 대한 스트레스가 건강을 해친 것으로 추정됐고 많은 한국인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고종도 “하늘이 무심하게도 왜 그를 이다지도 급히 데려갔단 말인가”라는 조문을 보냈다.

1909년 5월 2일 서대문 자택에서 거행됐던 베델의 장례식에는 수 천명이 모였고 그의 운구 행렬에는 사람들이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따랐다.
베델의 장례식 날에 대해 ‘대한매일신보’ 기사는 “양화도 장지로 가는 한국인 가운데 곡하는 자들이 상당수였고, 부인들도 배설(베델)공(公)의 집 근처에서 통곡했다. 영국 목사 터너가 장례식을 인도하고 한국 목사 전덕기가 기도한 뒤 성분하였는데 많이 이들이 분상 앞에서 절하며 그를 기렸다. 장지까지 따라온 인원은 내외국인 합쳐서 1000여명 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 닉 메타(Nik Metha) 주한 영국대사관 부대사가 지난 5월 1일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서 열린 베델 선생 경목식에 참석한 뒤, 베델의 묘비석을 살펴보고 있다.

▲ 닉 메타(Nik Metha) 주한 영국대사관 부대사가 지난 5월 1일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서 열린 베델 선생 경목식에 참석한 뒤, 베델의 묘비석을 살펴보고 있다.


베델은 한국에 도착해 6년 만에 유명을 달리했지만 사망 110년이 지난 2019년에도 그는 한국인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지난 5월 1일 베델이 영면해 있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서 열린 경모식에 참석한 주한 영국대사관 닉 메타(Nik Metha) 부대사는 “언론 매체를 통해 베델 선생은 한반도에서 한국의 이익을 방어하고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신했다”며 “대한민국의 광복을 보지 못했지만 그가 남겨둔 유산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경모했다.

이어 “베델은 한국의 역사에 잊혀지지 않을 발자국을 남겼다”며 “그의 업적은 현재의 견고한 한-영 관계에 크게 기여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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